상가하 강독: 테라와다 아비담마 입문, 제2편

해로운 마음 열둘,
세 뿌리와 여덟 꼭짓점『아비담맛타상가하』 제1장 §4 — 탐욕·성냄·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

첫 편에서 펼친 89가지 마음의 격자에서, 『상가하』가 가장 먼저 세기 시작하는 칸은 욕계의 해로운 마음입니다. 열두 가지밖에 되지 않는 이 칸은 그러나 아비담마가 마음을 어떻게 나누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견본이기도 합니다. 탐욕에 뿌리박은 여덟 마음은 느낌, 사견, 자극이라는 세 개의 두 갈래 기준을 곱해서 얻어지는 2 × 2 × 2의 입방체이고, 성냄에 뿌리박은 두 마음은 그 가운데 한 기준만 살아남은 선분이며,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두 마음은 기준 없이 서로 다른 성분으로만 구별되는 두 개의 점입니다. 이번 편에서는 제1장 §4의 빠알리 원문을 한 줄씩 읽고, 나라다 장로의 주석을 따라 세 뿌리와 세 기준의 뜻을 새긴 다음, 그 기준들이 실제로 무엇을 가르는지, 그리고 이 열두 마음이 수행의 길 위에서 어떤 순서로 사라지는지까지 따라가 봅니다.

전거
『아비담맛타상가하』 제1장 §4와 그 주석(주 8–22). 보충으로 제3장 §4–5(원인의 모음)와 느낌에 관한 주석, 제2장 §6·§10·§17(해로운 마음부수의 결합)
대본
나라다 장로 편역본의 빠알리 원문과 주석(영역문은 내용 확인에만 쓰고 인용하지 않음)
시간
약 100분 (본문 65분, 입방체·행렬·단계 탐색 20분, 연습 문제 15분)
세 뿌리의 작도바깥 고리의 열두 칸은 해로운 마음 열둘을 뿌리에 따라 색으로 나눈 것이다. 안쪽에는 탐욕에 뿌리박은 여덟 마음을 꼭짓점으로 하는 입방체, 성냄에 뿌리박은 두 마음을 양 끝으로 하는 선분,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두 마음을 나타내는 두 점이 그려져 있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2¹ 1 + 1 2³
세 뿌리의 작도. 바깥 고리의 열두 칸이 해로운 마음 열둘이고, 가는 실선이 각 칸을 안쪽 도형의 자리로 이어 줍니다. 탐욕의 여덟 마음은 입방체의 여덟 꼭짓점(2³), 성냄의 두 마음은 선분의 두 끝(2¹), 어리석음의 두 마음은 이어지지 않은 두 점(1 + 1)입니다.
  • 탐욕에 뿌리박은 8
  • 성냄에 뿌리박은 2
  •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2

네 가지 성질: 해로운 것, 유익한 것, 과보, 작용

전거: 제1장 §4의 주석 8, 15, 17

첫 편에서 우리는 마음을 두 개의 좌표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그 마음이 주로 어느 세계를 돌아다니는가, 곧 욕계·색계·무색계·출세간이라는 네 영역(bhūmi)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마음이 어떤 성질(jāti)을 지녔는가, 곧 해로운 것·유익한 것·과보·작용이라는 네 가지였습니다. 제1장 §4는 이 두 좌표가 만나는 첫 칸, 곧 ‘욕계’이면서 ‘해로운’ 마음에서 셈을 시작합니다. 그러니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두 번째 좌표, 네 가지 성질이 정확히 무엇을 가르는지부터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라다 장로는 §4에 붙인 첫 주석(주 8)에서 바로 이 일을 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어떤 마음이 해로운(akusala) 까닭은 그것이 탐욕(lobha), 적의(paṭigha), 어리석음(moha)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유익한(kusala) 마음은 탐욕 없음 곧 관대함(alobha), 성냄 없음 곧 선의(adosa), 어리석음 없음 곧 지혜(amoha)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앞의 것은 바라지 않는 결과(aniṭṭha vipāka)를 낳기 때문에 해롭고, 뒤의 것은 바라는 결과(iṭṭha vipāka)를 낳기 때문에 유익합니다. 그리고 이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을 함께 일컬어 빠알리어로 업(kamma)이라고 합니다.

이 업의 마음이 피할 수 없이 맺는 결과로서 일어나는 마음이 과보(vipāka)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나라다 장로가 특별히 못 박아 두는 점이 있습니다. 업도 과보도 순전히 정신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업보’라고 할 때 떠올리는 외적인 사건이나 처지가 아니라, 아비담마의 엄밀한 용어에서 과보란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 한 가지 마음을 가리킵니다. 네 번째 성질인 작용(kiriya, 또는 kriyā)은 글자 그대로는 ‘행위’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업으로서 효력이 없는 행위를 뜻합니다(주 17). 업은 원인으로서 효력이 있고, 작용은 원인으로서 효력이 없습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이 행하는 선한 일들이 작용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분들이 선과 악을 모두 넘어섰기 때문에 더는 업을 쌓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비담마는 과보와 작용을 한데 묶어 결정되지 않은 것(abyākata)이라고 부릅니다. 결과라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두 성질이 이 이름을 얻는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과보는 그 자체가 이미 결과이기 때문에 결정되지 않은 것이고, 작용은 결과를 낳지 않기 때문에 결정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는 사슬의 끝이어서, 다른 하나는 애초에 사슬을 이루지 않아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셈입니다.

‘꾸살라’라는 말

해로운 것(akusala)은 유익한 것(kusala)의 정반대이므로, 이 말을 이해하려면 결국 kusala를 먼저 풀어야 합니다. 나라다 장로는 주 15에서 『앗타살리니』가 제시하는 어원 풀이를 네 갈래로 소개합니다. 이 풀이들은 오늘날의 역사 언어학이 말하는 어원이라기보다, 낱말을 여러 방향에서 쪼개 보면서 그 안에 가르침을 담아내는 주석 전통의 해석법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ku + √sal첫째 풀이ku는 ‘나쁜’, √sal은 ‘흔들다, 떨게 하다, 부수다’. 나쁘고 비루한 것들을 흔들어 떨어내고 부수는 것.
kusa + √lu둘째 풀이kusa를 ku(나쁜) + √si(눕다)로 보아 ‘비루하게 누워 있는 것’ 곧 악덕으로 풀고, √lu(자르다)를 더해 ‘악덕을 잘라 내는 것’.
kusa + √lu / √la셋째 풀이ku(악) + √su(줄이다)로 kusa를 ‘악을 줄이고 없애는 것’ 곧 앎이나 지혜로 풀고, 그 지혜로 악을 잘라 내는 것, 또는 지혜로 붙잡는 것.
kusa 풀넷째 풀이양쪽 날로 손을 베는 꾸사 풀처럼, 이미 일어난 번뇌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의 두 쪽을 모두 잘라 내는 것.

뜻풀이 쪽에서 『앗타살리니』는 kusala라는 말이 건강함(ārogya), 허물없음(anavajja), 능숙함(cheka), 행복한 결과를 낳음(sukhavipāka)의 네 가지 뜻으로 쓰인다고 말합니다. 나라다 장로는 이 가운데 ‘능숙함’을 뺀 세 가지가 여기의 kusala에 들어맞는다고 판단합니다. 번뇌로 인한 몸과 마음의 병이 없다는 점에서 건강하고, 번뇌의 허물과 번뇌의 열기가 없다는 점에서 허물이 없으며, 행복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반드시 즐거운 느낌을 뜻하기보다 몸과 마음의 가벼움, 부드러움, 알맞음 같은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앗타살리니』는 또 kusala를 ‘능숙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으로도 풀면서, 여기서 능숙함(kosalla)이란 곧 지혜를 일컫는다고 덧붙입니다(kosallaṃ vuccati paññā).

유익함과 해로움의 기준

그렇다면 어떤 행위가 유익한지 해로운지는 무엇으로 판정하는가? 나라다 장로의 답은 짧습니다. 해로운 세 뿌리와 연결된 것은 해롭고, 유익한 세 뿌리와 연결된 것은 유익하다. 기준은 행위의 겉모습이나 사회적 평가가 아니라, 그 행위를 일으키는 순간의 마음에 어떤 뿌리가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비옥한 땅에 뿌린 씨앗이 조만간 제 본성에 따라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듯, 유익한 행위와 해로운 행위도 저마다 알맞은 결과를 낳는데, 그것을 과보라고 부릅니다. 다음 절에서 이 ‘뿌리’를 자세히 살핍니다.

세 뿌리: 탐욕, 성냄, 어리석음

전거: 제1장 §4의 주석 9, 제3장 §4–5(원인의 모음)

나무가 뿌리로 땅에 박혀 양분을 빨아올리고 줄기와 가지를 지탱하듯, 아비담마는 마음을 떠받치고 굳건하게 하는 몇몇 정신 요소를 뿌리(mūla) 또는 원인(hetu)이라고 부릅니다. 해로운 쪽의 뿌리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셋이고, 그 반대편에 유익한 뿌리 셋이 있습니다. 나라다 장로는 주 9에서 세 해로운 뿌리의 이름을 하나씩 어근으로 풀어 줍니다.

lobha√lubh · 달라붙다, 들러붙다탐욕, 집착. 갈애(taṇhā)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바람직한 감각 대상을 만나면 대개 일어납니다.
dosa√dus · 언짢아하다성냄. 바라지 않는 대상을 만나면 대개 일어나는 혐오입니다.
paṭighapaṭi(맞서) + √gha(= han) · 치다, 부딪다적의, 맞섬. dosa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입니다.
moha√muh · 미혹하다어리석음, 미혹. 대상을 구름처럼 가려 마음의 눈을 멀게 하는 것. 무명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이 세 뿌리 사이에는 비대칭이 하나 있습니다. 주석의 표현을 따르면, 아비담마에서 어리석음은 모든 해로운 것에 공통합니다. 탐욕과 성냄은 결코 홀로 일어나지 않고 언제나 어리석음과 함께 일어납니다. 반면에 어리석음은 홀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만을 뿌리로 하는 마음에는 ‘모무하(momūha)’, 곧 ‘강한 어리석음’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같은 음절을 겹쳐 뜻을 세게 만든 말입니다.

세 뿌리와 열두 마음의 자리어리석음을 나타내는 큰 원 안에 탐욕과 성냄을 나타내는 두 원이 서로 겹치지 않게 들어 있다. 탐욕의 원 안에 1번부터 8번, 성냄의 원 안에 9번과 10번, 두 원 밖이면서 큰 원 안인 자리에 11번과 12번 마음이 놓인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lobha 탐욕 dosa 성냄 moha 어리석음 뿌리 둘 dvihetuka · 10 뿌리 하나 ekahetuka · 2
그림 1. 세 뿌리의 포함 관계. 어리석음의 원은 해로운 마음 열둘을 모두 감쌉니다. 탐욕의 원과 성냄의 원은 그 안에 있으되 서로 겹치지 않습니다. 탐욕은 여덟 마음에만, 성냄은 두 마음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두 원 밖이면서 큰 원 안인 자리에 어리석음만을 뿌리로 하는 두 마음이 놓입니다.

그림으로 그려 보면 이 관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탐욕과 성냄이 한 마음 안에서 만나는 일은 없으므로 두 원은 떨어져 있고, 어느 쪽이든 어리석음 없이는 설 수 없으므로 두 원은 모두 큰 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제3장 §4의 원인의 모음은 이 그림을 숫자로 확인해 줍니다. 그곳의 셈에 따르면 89가지 마음 가운데 뿌리가 전혀 없는 마음이 18가지이고, 나머지 71가지는 뿌리가 있는데, 그중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두 마음은 뿌리가 하나인 마음(ekahetuka)이며, 나머지 해로운 마음 열 가지는 지혜와 결합하지 않은 욕계의 아름다운 마음 열두 가지와 함께 뿌리가 둘인 마음(dvihetuka)입니다. 탐욕의 여덟 마음은 탐욕과 어리석음이라는 두 뿌리를, 성냄의 두 마음은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두 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Lobho doso ca moho ca hetū akusalā tayo,Alobhādosāmoho ca kusalābyākatā tathā.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이 셋은 해로운 원인이고, 탐욕 없음과 성냄 없음과 어리석음 없음은 유익한 것과 결정되지 않은 것의 원인이다.

제3장 §5 요약 게송 전반부

유익한 뿌리는 단지 ‘없음’이 아니다

주 9의 끝에서 나라다 장로는 유익한 세 뿌리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붙입니다. 이 뿌리들의 이름은 모두 부정 접두사 a-로 시작하지만, 단지 어떤 나쁜 조건이 없다는 뜻에 그치지 않고 어떤 좋은 조건이 적극적으로 있다는 뜻까지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탐욕 없음(alobha)은 집착하지 않음일 뿐 아니라 관대함이고, 성냄 없음(adosa)은 화내지 않음일 뿐 아니라 선의이자 자애(mettā)이며, 어리석음 없음(amoha)은 미혹되지 않음일 뿐 아니라 지혜 또는 앎(ñāṇa, paññā)입니다. 이번 편은 해로운 쪽만 다루지만, 제4편에서 유익한 마음을 읽을 때 이 단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원문 읽기: 제1장 §4

전거: 제1장 §4 본문과 요약 게송

이제 본문을 읽습니다. §4는 “Tattha katamaṃ kāmāvacaraṃ?”, 곧 “그 가운데 무엇이 욕계의 마음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욕계 마음의 목록을 해로운 마음부터 풀어 놓습니다. 아래에 열두 줄을 빠알리 원문 그대로 옮기고 우리말 번역을 나란히 두었습니다. 원문에서 세 가지 기준에 해당하는 말은 색으로 구별했습니다. 붉은색은 느낌, 쪽빛은 사견이나 적의 같은 결합 요소, 금빛은 자극의 유무입니다. 각 줄 끝의 ekaṃ은 ‘하나’라는 뜻으로, 그 줄이 마음 한 가지를 가리킨다는 표시입니다.

  1. 1Somanassa-sahagataṃ, diṭṭhigatasampayuttaṃ, asaṅkhārikam ekaṃ,기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하였으며, 자극받지 않은 것 하나,
  2. 2Somanassa-sahagataṃ, diṭṭhigatasampayuttaṃ, sasaṅkhārikam ekaṃ,기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하였으며, 자극받은 것 하나,
  3. 3Somanassa-sahagataṃ, diṭṭhigatavippayuttaṃ, asaṅkhārikam ekaṃ,기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하지 않았으며, 자극받지 않은 것 하나,
  4. 4Somanassa-sahagataṃ, diṭṭhigatavippayuttaṃ, sasaṅkhārikam ekaṃ,기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하지 않았으며, 자극받은 것 하나,
  5. 5Upekkhāsahagataṃ, diṭṭhigatasampayuttaṃ, asaṅkhārikam ekaṃ,평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하였으며, 자극받지 않은 것 하나,
  6. 6Upekkhāsahagataṃ, diṭṭhigatasampayuttaṃ, sasaṅkhārikam ekaṃ,평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하였으며, 자극받은 것 하나,
  7. 7Upekkhāsahagataṃ, diṭṭhigatavippayuttaṃ, asaṅkhārikam ekaṃ,평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하지 않았으며, 자극받지 않은 것 하나,
  8. 8Upekkhāsahagataṃ, diṭṭhigatavippayuttaṃ, sasaṅkhārikam ekan’ ti.평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하지 않았으며, 자극받은 것 하나.
  9. ∴Imāni aṭṭha pi lobhasahagatacittāni nāma.이 여덟 가지를 탐욕이 함께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10. 9Domanassasahagataṃ, paṭighasampayuttaṃ, asaṅkhārikam ekaṃ,불쾌함이 함께하고, 적의와 결합하였으며, 자극받지 않은 것 하나,
  11. 10Domanassasahagataṃ, paṭighasampayuttaṃ, sasaṅkhārikam ekan’ ti.불쾌함이 함께하고, 적의와 결합하였으며, 자극받은 것 하나.
  12. ∴Imāni dve pi paṭighasampayuttacittāni nāma.이 두 가지를 적의와 결합한 마음이라고 한다.
  13. 11Upekkhāsahagataṃ, vicikicchāsampayuttam ekaṃ,평온이 함께하고, 의심과 결합한 것 하나,
  14. 12Upekkhāsahagataṃ, uddhaccasampayuttam ekan’ ti.평온이 함께하고, 들뜸과 결합한 것 하나.
  15. ∴Imāni dve pi momūhacittāni nāma.이 두 가지를 강한 어리석음의 마음이라고 한다.
  16. ∎Icc’ evaṃ sabbathā pi dvādasākusalacittāni samattāni.이와 같이 모두 해서 해로운 마음 열두 가지가 끝났다.

몇 가지 문법 요소를 짚어 두면 앞으로 나올 긴 이름들을 훨씬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sahagata는 ‘함께 간’, 곧 ‘동반된, 함께하는’이라는 뜻이고 주로 느낌에 붙습니다. sampayutta는 ‘함께 묶인’, 곧 ‘결합한’이라는 뜻이며, 그 반대인 vippayutta는 ‘결합하지 않은’입니다. diṭṭhigata는 견해(diṭṭhi)에 ‘간, 들어선’이라는 뜻의 gata가 붙은 형태로, 이 목록에서는 사견 그 자체와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asaṅkhārika와 sasaṅkhārika는 제6절에서 자세히 봅니다.

그리고 이 절 전체를 두 줄로 간추리는 요약 게송이 붙습니다. 『상가하』는 이렇게 각 단락을 게송으로 매듭짓는 방식을 끝까지 유지하는데, 전통적으로 학인들은 산문 부분을 이해한 뒤 이 게송들을 외워 전체의 뼈대를 기억에 새겼습니다.

Aṭṭhadhā lobhamūlāni — dosamūlāni ca dvidhāMohamūlāni ca dve ti — dvādasākusalā siyuṃ.

탐욕에 뿌리박은 것이 여덟, 성냄에 뿌리박은 것이 둘,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것이 둘이니, 해로운 것은 모두 열둘이다.

제1장 §4 요약 게송

본문의 무리 이름과 게송의 이름이 조금 다르다는 데 주의하십시오. 본문은 둘째 무리를 ‘적의와 결합한 마음(paṭighasampayutta)’이라고 불렀는데, 게송은 ‘성냄에 뿌리박은 것(dosamūla)’이라고 부릅니다. 앞 절에서 본 대로 paṭigha와 dosa는 같은 것을 가리키는 두 이름이므로, 본문은 결합 요소의 이름으로, 게송은 뿌리의 이름으로 같은 두 마음을 부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강한 어리석음의 마음’은 게송에서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것’이 됩니다.

첫째 기준: 느낌

전거: 제1장 §4의 주석 10, 제3장 느낌의 모음에 붙은 주석

목록의 각 줄이 가장 먼저 밝히는 것은 그 마음과 함께하는 느낌(vedanā)입니다. 느낌은 모든 마음에 반드시 있는 정신 요소이므로, 어떤 마음이든 어떤 느낌과 함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라다 장로는 주 10에서 느낌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기쁨(somanassa), 불쾌함(domanassa),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평온(upekkhā)입니다. 여기에 몸의 괴로움(dukkha)과 몸의 즐거움(sukha)을 더하면 모두 다섯이 됩니다.

somanassasu(좋은) + mana(마음)‘좋은 마음 상태’. 정신적 기쁨, 즐거운 느낌.
domanassadu(나쁜) + mana(마음)‘나쁜 마음 상태’. 정신적 불쾌함.
upekkhā중립의 느낌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 무관심이라고 옮기더라도 냉담함의 뜻은 아닙니다.
sukhasu(쉬운) + kha(견디다)‘견디기 쉬운 것’. 몸의 즐거움.
dukkhadu(어려운) + kha(견디다)‘견디기 어려운 것’. 몸의 괴로움.

이 다섯 가운데 기쁨·불쾌함·평온의 셋은 순전히 정신적인 느낌이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둘은 순전히 육체적인 느낌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모든 느낌이 마음부수이므로 정신에 속하지만, 즐거움과 괴로움은 몸의 감촉과 관련해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따로 구별합니다. 나라다 장로는 여기서 놀라운 숫자 하나를 알려 줍니다. 89가지 마음 가운데 괴로움과 함께하는 마음은 단 하나, 즐거움과 함께하는 마음도 단 하나이며, 불쾌함과 함께하는 마음은 둘뿐이고, 나머지 85가지는 모두 기쁨이나 평온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감촉에 평온한 느낌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몸에 닿는 감촉은 반드시 즐겁거나 괴롭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 숫자에서 우리가 이번 편에서 챙겨 갈 사실은 이것입니다. 불쾌함과 함께하는 마음 둘이 바로 §4의 9번과 10번, 곧 적의와 결합한 두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불쾌한 느낌은 89가지 마음 전체에서 오직 이 두 곳에만 나타납니다. 그러면 해로운 마음 열두 가지는 느낌에 따라 어떻게 나뉘는지 한 줄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기쁨 4평온 6불쾌 2

기쁨이 넷, 평온이 여섯, 불쾌함이 둘입니다. 탐욕의 마음은 기쁨과 함께할 수도 평온과 함께할 수도 있어서 느낌이 하나의 갈림길이 되지만, 성냄의 마음은 언제나 불쾌함과, 어리석음의 마음은 언제나 평온과 함께하므로 이들에게 느낌은 더 이상 갈림길이 아닙니다. 이 차이가 뒤의 제8절에서 도형의 차원을 가르는 첫 번째 열쇠가 됩니다.

해로운 마음 속의 평온

같은 ‘평온’이라는 이름이라도 그것이 어떤 마음에 들어 있느냐에 따라 성격이 사뭇 다르다는 점을 나라다 장로는 제3장의 느낌에 관한 주석에서 따로 설명합니다. 해로운 마음 속의 평온은 어리석음이 부추긴 것이어서 둔하고 무감각한 무관심에 가깝습니다. 원인 없는 과보의 마음, 예컨대 단순한 감각 인상 속의 평온은 윤리적 가치가 없는 단순한 중립의 느낌입니다. 욕계의 아름다운 마음 속의 평온은 어리석음이 없으므로 둔하지 않은 무관심에서 치우침 없는 마음, 완전한 평정까지 여러 모습일 수 있고, 선정의 마음 속의 평온은 삼매에서 태어난 완전한 평정입니다. 그러니 5번부터 8번까지의 탐욕의 마음이 ‘평온과 함께한다’는 말을 ‘고요하고 초연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덤덤하게, 별다른 감흥 없이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둘째 기준: 사견

전거: 제1장 §4의 주석 11, 21의 각주, 제2장 §6의 주석 45–46

두 번째로 밝히는 것은 그 마음이 사견과 결합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견해(diṭṭhi)는 ‘보다, 지각하다’라는 뜻의 어근 √dis에서 나온 말로, 보통 견해, 믿음, 의견 등으로 옮깁니다. 앞에 ‘바른(sammā)’이 붙으면 바른 견해가 되고 ‘그릇된(micchā)’이 붙으면 그릇된 견해가 됩니다. 그런데 주 11이 알려 주듯, 여기서는 아무 수식어 없이 쓰였는데도 그릇된 견해, 곧 사견의 뜻입니다. 해로운 마음의 목록 안에서 ‘견해와 결합했다’는 말이 바른 견해를 가리킬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견해가 사견인가? 나라다 장로는 열 가지 해로운 행위를 설명하는 주 21의 각주에서 대표적인 세 가지를 듭니다. 업의 결과를 부정하는 견해(natthika-diṭṭhi), 원인과 결과를 모두 부정하는 견해(ahetuka-diṭṭhi), 업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akiriya-diṭṭhi)입니다. 해로운 짓을 저지르면서 ‘이것은 아무 과보도 없다’, ‘선악이란 본래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 바로 사견과 결합한 마음입니다.

왜 사견은 탐욕의 마음에만 있는가

§4의 목록을 다시 보면, 사견이라는 기준은 탐욕의 여덟 마음에만 등장합니다. 성냄의 두 마음이나 어리석음의 두 마음에는 사견과의 결합 여부를 묻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제2장에서 마음부수를 다룰 때 나라다 장로가 붙인 주석(주 45)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견은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일으키기 때문에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견해에 대한 집착은 결국 한 가지 집착이고, 집착은 탐욕의 몫이라는 논리입니다.

한 굴에 살 수 없는 두 마리 사자

같은 곳의 주 46은 사견의 짝이 되는 정신 요소 하나를 소개합니다. 자만(māna)입니다. 자만 역시 자기 자신과 관련된 ‘나’라는 관념에서 비롯하므로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사견과 자만은 한 마음에서 동시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견이 있는 곳에는 자만이 없습니다. 주석서들은 이 둘을 한 굴에 함께 살 수 없는 두 마리의 사자에 비유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만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네 마음(3·4·7·8번)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네 마음에 자만이 언제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어날 수 있는 자리가 거기뿐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이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읽게 해 줍니다. 3·4·7·8번 마음은 단지 사견이 빠진 마음이 아니라, 사견 대신 자만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사견의 기준은 탐욕의 여덟 마음을 ‘견해의 집착’ 쪽 넷과 ‘나라는 자부’가 들어설 수 있는 쪽 넷으로 가르는 셈입니다.

셋째 기준: 자극

전거: 제1장 §4의 주석 12, 제2장 §6의 주석 48

세 번째 기준은 그 마음이 자극을 받아 일어났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 쓰인 saṅkhārika라는 말에 대해 나라다 장로는 이것이 아비담마에서 특정한 뜻으로만 쓰이는 순수한 전문 용어라고 먼저 밝힙니다. 이 말의 바탕인 saṅkhāra는 saṃ(잘) + √kar(하다, 마련하다, 이루다)로 이루어져, 글자 그대로는 ‘이루어 냄, 준비함, 배열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dhamma가 그렇듯 saṅkhāra도 뜻이 여럿인 말이어서, 정확한 뜻은 문맥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주 12는 그 쓰임을 셋으로 정리합니다.

무더기로서다섯 무더기 가운데 하나로 쓰일 때는 느낌과 인식을 뺀 모든 마음부수를 가리킵니다. 첫 편에서 본 대로 52가지 마음부수 가운데 50가지입니다.
연기에서연기(paṭicca-samuppāda)의 고리에 쓰일 때는 유익하거나 해로운 모든 행위, 좋고 나쁜 생각들에 적용됩니다.
형성된 것으로서변하고 괴로운 것을 뜻할 때는 조건 지어진 모든 것에 두루 적용됩니다.

§4에서는 이 말 앞에 ‘함께’를 뜻하는 sa-나 ‘없이’를 뜻하는 a-가 붙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sasaṅkhārika는 ‘애씀과 함께하는’, asaṅkhārika는 ‘애씀 없는’ 마음입니다. 나라다 장로의 설명에 따르면 자극받은 마음이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부추김, 선동, 유도를 받아 일어나는 마음이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이란 그런 영향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그가 드는 예는 이렇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끌려서, 혹은 스스로 오래 궁리하고 미리 마음먹은 끝에 어떤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자극받은 마음입니다. 반대로 안팎의 아무런 유도도, 미리 마음먹음도 없이 즉석에서 그 행위를 한다면 자극받지 않은 마음입니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점이 있습니다. 자극은 남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부추겨질 수 있다는 말은, 망설이던 마음을 스스로 떠밀어 일으키는 경우도 자극받은 마음에 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기준이 가르는 것은 외부의 개입 여부라기보다, 마음이 곧장 솟구치는가 아니면 무언가에 떠밀려서야 일어나는가 하는 마음 자체의 기세입니다.

자극받은 마음에만 오는 두 손님

이 기세의 차이가 실제로 마음의 구성을 바꾼다는 증거가 제2장에 있습니다. 해태(thīna)와 혼침(middha)이라는 두 마음부수는 자극받은 다섯 마음, 곧 2·4·6·8·10번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라다 장로의 설명(주 48)에 따르면 해태와 혼침은 본성상 적응력과 반대되는 것이어서 추진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극받지 않은 마음은 본래 날카롭고 활발하기 때문에 이 둘이 끼어들 수 없고, 오직 자극받은 마음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무기력한 마음이 스스로를 떠밀어야 겨우 움직이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여덟 꼭짓점: 탐욕의 입방체

전거: 제1장 §4 본문 1–8번과 주석 18, 22, 제2장 §6·§17(미리보기)

이제 세 기준을 한데 모읍니다.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은 느낌에서 둘(기쁨, 평온), 사견에서 둘(결합, 비결합), 자극에서 둘(없음, 있음)로 갈리고, 세 기준은 서로 독립적이어서 어떤 조합이든 가능합니다. 그러니 가짓수는 2 × 2 × 2 = 8입니다. 세 개의 독립된 두 갈래 기준이 만드는 여덟 가지 조합은 기하학적으로 정확히 입방체의 여덟 꼭짓점과 같습니다. 가로축을 자극, 세로축을 사견, 깊이 축을 느낌으로 잡으면 여덟 마음이 하나씩 꼭짓점에 앉습니다.

목록의 순서는 이진법의 셈이다

본문의 번호 매김에는 아름다운 규칙이 숨어 있습니다. 목록을 다시 보면 느낌은 네 줄마다 한 번 바뀌고(기쁨 넷 다음 평온 넷), 사견은 두 줄마다 한 번 바뀌며(결합 둘, 비결합 둘, 다시 결합 둘…), 자극은 한 줄마다 바뀝니다(없음, 있음, 없음, 있음…). 이것은 자동차의 주행 거리계가 돌아가는 방식, 곧 이진법으로 수를 세는 방식과 똑같습니다. 각 기준에서 앞의 것(기쁨, 결합, 없음)을 0, 뒤의 것(평온, 비결합, 있음)을 1로 적으면, 1번 마음은 000, 2번은 001, 3번은 010이 되고, 8번은 111이 됩니다. 식으로 쓰면 이렇습니다.

번호 = 4 × 느낌 + 2 × 사견 + 1 × 자극 + 1

『상가하』가 이진법을 의식하고 목록을 짰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세 기준을 늘 같은 순서로, 바깥 기준부터 안쪽 기준으로 차례차례 짝지어 가는 체계적인 열거가 자연스럽게 이런 구조를 만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구조를 알아 두면 목록을 외울 필요가 거의 없어집니다. “6번은?”이라는 물음에 6 − 1 = 5 = 101을 떠올리면 평온, 결합, 자극 있음이 곧바로 나옵니다.

번호느낌사견자극부호
1기쁨결합없음000
2기쁨결합있음001
3기쁨비결합없음010
4기쁨비결합있음011
5평온결합없음100
6평온결합있음101
7평온비결합없음110
8평온비결합있음111
표 1. 탐욕에 뿌리박은 여덟 마음의 이진 부호. 첫 자리는 느낌, 둘째 자리는 사견, 셋째 자리는 자극입니다.

입방체를 직접 돌려 보기

아래 도형에서 꼭짓점을 누르거나, 위의 세 단추로 기준을 하나씩 바꿔 보십시오. 선택한 마음의 빠알리 이름, 나라다 장로가 든 예시, 그 마음에 함께할 수 있는 해로운 마음부수(제2장 미리보기), 그리고 그 마음이 수행의 어느 단계에서 끊어지는지가 오른쪽에 나타납니다. 선택한 꼭짓점에서 뻗어 나간 세 모서리가 붉게 표시되고, 그 끝의 이웃 꼭짓점 셋에는 점선 테두리가 생깁니다. 입방체에서 모서리 하나로 이어진 두 꼭짓점은 언제나 기준 하나만 다릅니다. 모서리 하나를 따라가는 것은 기준 하나를 뒤집는 일입니다.

느낌
사견
자극
자극 없음 ⟶ 자극 있음 asaṅkhārika · sasaṅkhārika 사견 결합 ⟶ 비결합 기쁨 ⟶ 평온 1000 2001 3010 4011 5100 6101 7110 8111

탐색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을 미리 짚어 두겠습니다. 위쪽 면, 곧 사견과 결합한 네 꼭짓점(1·2·5·6번)은 모두 같은 단계에서 사라집니다. 수행의 길에서 이 입방체는 한 번에 무너지지 않고, 면 하나가 먼저 떨어져 나간 뒤 남은 면이 나중에 사라집니다. 이것은 제12절에서 다시 봅니다.

성냄의 선분, 어리석음의 두 점

전거: 제1장 §4 본문 9–12번과 주석 9, 13, 14, 19, 20, 제3장 느낌의 모음 주석 7

탐욕의 마음이 여덟인데 성냄의 마음과 어리석음의 마음은 왜 둘씩밖에 없을까요? 세 기준을 하나씩 대어 보면 답이 나옵니다. 어떤 기준이 한쪽 값으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기준은 더 이상 마음을 가르지 못하고, 도형의 차원이 하나씩 줄어듭니다.

2 × 2 × 2 = 8탐욕 · 세 기준이 모두 살아 있음느낌(기쁨/평온), 사견(결합/비결합), 자극(없음/있음)이 모두 갈림길입니다.
2 = 2성냄 · 자극 기준만 남음느낌은 불쾌함으로 고정되고, 사견은 탐욕의 몫이므로 사라집니다.
1 + 1 = 2어리석음 · 남은 기준 없음느낌은 평온으로 고정되고, 두 마음은 결합한 요소(의심/들뜸)로만 구별됩니다.

성냄: 느낌이 고정되고 사견이 빠지다

9번과 10번 마음은 언제나 불쾌함과 함께합니다. 나라다 장로는 살생을 다루는 주 19에서 이 관계를 양방향으로 못 박습니다. 적의가 있는 곳에 불쾌함이 있고, 불쾌함이 있는 곳에 거칠든 미묘하든 적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3장의 느낌에 관한 주석(주 7)도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불쾌함은 오직 적의와 결합한 두 마음에만 있고, 화가 날 때 우리는 불쾌함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냄의 마음에서 느낌은 갈림길이 아닙니다. 사견의 기준은 앞의 제5절에서 본 대로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에만 속하므로 여기서는 아예 묻지 않습니다. 남는 것은 자극 하나뿐이고, 그래서 성냄의 두 마음은 자극이 없는 9번과 자극이 있는 10번, 한 선분의 두 끝이 됩니다.

어리석음: 기준 대신 짝이 되는 요소로

11번과 12번 마음은 언제나 평온과 함께합니다. 그 이유를 나라다 장로는 주 20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두 마음은 어리석음이나 마음의 둔함 때문에 힘이 약하고, 그래서 함께하는 느낌이 즐거운 것도 불쾌한 것도 아닌 중립이라는 것입니다. 사견의 기준은 여기서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 두 마음을 자극의 유무로 나누지도 않습니다. 세 기준이 모두 사라졌으므로 두 마음은 어떤 축 위에서 이어지지 않고, 각자 어떤 요소와 결합했느냐로만 구별되는 두 개의 떨어진 점입니다. 11번은 의심(vicikicchā)과, 12번은 들뜸(uddhacca)과 결합합니다.

vicikicchā ①vici(= vicinanto, 찾아 헤매며) + √kicch(지치다, 애먹다)당혹스러운 생각 때문에 애를 먹는 상태.
vicikicchā ②vi(없는) + cikicchā(치료)앎이라는 치료약이 없는 상태.
uddhaccau(위로) + √dhu(떨다, 흥분하다)지나치게 들뜸, 흔들려 일어남. 한 대상에 모인 마음(ekaggatā)의 정반대.

의심에 대해 주석(주 13)은 두 가지 해석을 전하는데, 둘 다 무엇 하나도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나라다 장로는 여기서 곧바로 오해를 막는 말을 덧붙입니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추론이나 탐구는 불교에서 막는 것이 아니며, 맹목적인 믿음을 권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로운 마음 속의 의심은 탐구가 아니라 탐구가 막혀 버린 상태, 붓다나 가르침의 효력을 어리석음 때문에 의심하는 상태(주 20의 예시)입니다. 들뜸에 대해 주 14는 혼란스럽고 안정되지 못한 마음 상태를 뜻한다고 하고, 『앗타살리니』를 따라 그것을 불안, 마음의 산란, 혼란으로 풉니다. 주 20의 예시는 마음이 산란하여 대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절의 요점을 수식으로

세 무리의 가짓수는 ‘살아 있는 기준의 개수’로 설명됩니다. 탐욕은 기준 셋이 살아 있어 2³ = 8, 성냄은 하나만 살아 있어 2¹ = 2, 어리석음은 하나도 살아 있지 않아 원래라면 2⁰ = 1이어야 하지만, 결합 요소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심, 들뜸)가 있어 1 + 1 = 2가 됩니다. 합하면 8 + 2 + 2 = 12입니다. 다만 이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정리일 뿐, 본문이 이런 식으로 셈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저 열두 줄을 열거할 뿐이고, 그 열거가 이런 질서를 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읽는 이의 몫입니다.

기준은 무엇을 가르는가: 제2장 미리보기

전거: 제2장 §6(해로운 마음부수)과 주석 44–48, §10 게송, §17(해로운 마음의 결합)

지금까지 세 기준을 ‘마음을 나누는 잣대’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 물을 수 있습니다. 기준이 다르면 그 마음 안에서 실제로 무엇이 달라지는가? 제1편에서 보았듯 마음은 언제나 마음부수들과 함께 일어나므로, 두 마음이 다르다는 것은 결국 함께하는 마음부수의 구성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 물음의 답은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만, 해로운 마음만큼은 여기서 미리 들여다볼 가치가 있습니다. 세 기준이 모두 구체적인 마음부수의 출입으로 번역되기 때문입니다.

제2장 §6은 해로운 마음부수 열네 가지가 열두 마음에 어떻게 나뉘어 들어가는지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어리석음, 부끄러움 없음, 두려움 없음, 들뜸의 넷은 모든 해로운 마음에 공통합니다(sabbākusalasādhāraṇā). 나라다 장로는 이 넷이 공통인 이유를 이렇게 풉니다(주 44). 악을 저지르는 이는 그 나쁜 결과를 알지 못하므로 모든 악의 뿌리는 어리석음이고, 거기에 악을 저지르는 데 대한 부끄러움 없음과 뒤따를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음이 붙으며, 악을 저지를 때에는 마음에 어느 정도의 들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특정한 마음에만 들어갑니다.

해로운 마음부수 12345678 9101112
어리석음·부끄러움 없음·두려움 없음·들뜸moha, ahirika, anottappa, uddhacca
탐욕lobha
사견diṭṭhi
자만māna
성냄dosa
질투·인색·후회issā, macchariya, kukkucca
해태·혼침thīna, middha
의심vicikicchā
참고: 희열pīti
함께할 수 있는 마음부수 최대 수192119211820182020221515
표 2. 해로운 마음부수 14가지의 분포(제2장 §6)와 마음별 최대 결합 수(제2장 §17). 희열은 해로운 마음부수가 아니라 제2장에서 ‘다른 것과 같아지는 것(aññasamāna)’ 13가지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는 요소이지만, 느낌의 기준과 맞물리므로 참고로 넣었습니다. 최대 수는 해로운 마음부수에 이 ‘다른 것과 같아지는 것’ 가운데 그 마음에 들어가는 것들을 더한 셈입니다.
그 마음에 언제나 있음그 마음에서만 일어날 수 있되 이따금 일어남

이 표를 입방체 위에 겹쳐 보면 세 기준이 각각 무엇을 가르는지가 드러납니다. 사견의 기준은 사견이 있느냐, 그 대신 자만이 들어설 수 있느냐를 가릅니다(1·2·5·6번 대 3·4·7·8번). 자극의 기준은 해태와 혼침이 들어설 수 있느냐를 가릅니다(짝수 번 대 홀수 번, 그리고 9번 대 10번). 느낌의 기준은 희열이 있느냐를 가릅니다(1–4번 대 5–8번). 그러니 입방체의 세 축은 단지 이름을 붙이기 위한 분류가 아니라, 그 마음에 실제로 들어가는 성분의 차이를 따라 그어진 선입니다.

Issā-macchera-kukkucca — virati karuṇādayoNānā kadāci māno ca — thīna-middhaṃ tathā saha.

질투, 인색, 후회, 절제들, 연민 등은 따로따로, 이따금 일어나고, 자만도 그러하며, 해태와 혼침은 그와 같이 이따금 일어나되 함께 일어난다.

제2장 §10 게송 전반부

표에서 빈 동그라미로 표시한 요소들이 바로 이 게송이 말하는 ‘이따금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게송의 단어 하나하나가 정밀한 규칙입니다. 질투와 인색과 후회는 ‘따로따로(nānā)’ 일어나므로, 성냄의 마음에 인색이 일어난 순간에는 질투나 후회가 함께하지 않습니다. 반면 해태와 혼침은 ‘함께(saha)’ 일어나므로, 둘 중 하나만 들어오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만은 3·4·7·8번 마음에서만 일어날 수 있지만 그 마음들에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 단어의 차이는 이번 편의 마지막 연습 문제에서 다시 만납니다.

표 아래 줄의 최대 수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제7편과 제8편에서 차근차근 계산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짝을 이룬 두 마음의 수가 늘 2씩 차이 난다는 점(19와 21, 18과 20, 20과 22)만 확인해 두면 충분합니다. 그 2가 바로 자극받은 마음에만 들어갈 수 있는 해태와 혼침입니다. 또 기쁨의 마음과 평온의 마음이 1씩 차이 나는 것(19와 18)은 희열 하나의 차이입니다.

사과 한 알과 개미 한 마리

전거: 제1장 §4의 주석 18–20

나라다 장로는 추상적인 열두 줄에 살을 붙이려고 일상의 예를 듭니다(주 18). 탐욕의 여덟 마음에는 사과를 훔치는 소년이 등장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그것이 나쁜 일이라는 생각 없이 즉석에서 사과를 훔치면 1번 마음입니다. 친구의 부추김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나쁜 일이라는 생각 없이 훔치면 2번 마음입니다. 3번과 4번은 같은 장면이되 사견 없이 훔치는 경우이고, 5번부터 8번까지는 앞의 넷과 같되 중립의 느낌으로 훔치는 경우입니다. 성냄의 두 마음에는 증오로 사람을 해치는 장면이 쓰입니다. 미리 마음먹지 않고 증오로 살인을 저지르면 9번, 미리 궁리한 끝에 저지르면 10번입니다. 어리석음의 두 마음은 앞 절에서 본 대로 붓다의 존재나 가르침의 효력을 어리석음 때문에 의심하는 사람(11번), 마음이 산란하여 대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12번)입니다.

이 예시들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 줍니다. 아비담마가 분석하는 것은 ‘도둑질’이나 ‘살인’이라는 행위의 종류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순간의 마음입니다. 같은 사과 도둑질도 그 순간 마음이 어떤 느낌, 어떤 견해, 어떤 기세를 띠느냐에 따라 여덟 가지 서로 다른 마음으로 나뉩니다.

살생은 언제나 적의의 마음으로 하는가

주 19는 이 원칙을 가장 까다로운 행위인 살생에 적용해 봅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살생은 언제나 적의나 혐오와 함께 행해집니다. 동기가 무엇이든, 사람은 원칙적으로 적의의 생각을 품고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 절에서 보았듯 적의가 있는 곳에는 불쾌함이 있고, 불쾌함이 있는 곳에는 거칠든 미묘하든 적의가 있습니다. 나라다 장로는 이 원칙을 여러 사례에 대어 봅니다. 아래 카드의 오른쪽 위 표시는 그가 각 사례에서 어느 마음을 가리키는지, 또는 물음으로 남겨 두는지를 나타냅니다.

3?개미를 죽이는 어린아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웃으면서 개미를 죽입니다. 아이는 자신이 살생의 악을 저지른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놀고 있을 뿐입니다. 이 아이에게 적의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상을 어루만지며 기쁘게, 순진하게 하는 일이므로 9번이나 10번일 수는 없습니다. 나라다 장로는 그렇다면 탐욕에 뿌리박은 3번 마음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물음의 형태로 남겨 둡니다.

9 · 10재미로 사냥하는 어른

재미 삼아 죽이는 어른은 9번이나 10번 마음을 경험합니다. 죽이는 순간에는 나쁜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체 해부를 하는 과학자

과학자는 조금의 가책도 없이 생체 해부를 할 수 있고, 그 주된 동기는 고통을 덜기 위한 과학적 탐구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거기에는 죽인다는 생각이 있다고 나라다 장로는 짚습니다.

적의고통을 끝내 주려는 살생

상처 입은 동물의 고통을 끝내 주려고 연민에 이끌려 죽이는 경우에도, 죽이는 순간에는 대상에 대한 어떤 혐오가 있으므로 적의가 있다고 봅니다. 동기가 연민이라 해도 죽이는 순간의 마음은 따로 분석된다는 것입니다.

적의시험에 떨어져 속상한 사람,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우는 사람

이런 슬픔에도 적의가 있는가? paṭigha의 뜻, 곧 ‘맞서 부딪침’을 생각해 보면 답이 분명해진다고 합니다. 반갑지 않은 소식이나 사건에 대한 미묘한 혐오가 틀림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없음불환자와 아라한

불환자와 아라한은 적의를 뿌리 뽑았으므로 결코 슬퍼하거나 비탄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 예류자였던 아난다 존자는 크게 슬퍼했지만, 아라한이나 불환자인 깟사빠 존자와 아누룻다 존자는 눈물 없이 완전한 평정을 지켰다고 주석은 전합니다.

이 대목은 아비담마의 분석이 우리의 일상적 도덕 감각과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어긋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우는 일은 일상의 눈으로는 조금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지만, 아비담마의 눈으로 보면 그 순간의 마음은 불쾌함과 함께하는 적의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슬퍼하는 사람을 나무라는 말이 아닙니다. 순간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분류하는 말이고, 동시에 그런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불환자와 아라한의 경지라는 것을 알려 주는 지도입니다. 아난다 존자의 눈물과 두 장로의 평정이 나란히 놓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례는 제12절에서 볼 ‘어느 단계에서 어느 마음이 끊어지는가’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열 가지 해로운 행위와 열두 마음

전거: 제1장 §4의 주석 21과 그 각주

주 21은 경전에 자주 나오는 열 가지 해로운 행위를 열두 마음과 짝지어 줍니다. 열 가지는 몸, 말, 생각의 세 통로로 나뉩니다. 몸으로 하는 것은 살생(pāṇātipāta), 주지 않은 것을 가짐(adinnādāna),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삿된 행위(kāmesu micchācāra)의 셋이고, 말로 하는 것은 거짓말(musāvāda), 이간하는 말(pisuṇavācā), 거친 말(pharusavācā), 쓸데없는 말(samphappalāpa)의 넷이며, 생각으로 하는 것은 탐내는 마음(abhijjhā), 악의(vyāpāda),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의 셋입니다. 나라다 장로는 이 모든 해로운 것이 앞의 열두 마음으로 저질러진다고 한 뒤, 각각이 주로 어느 마음으로 저질러지는지를 하나씩 배정합니다.

해로운 행위 12345678 9101112
살생pāṇātipāta
주지 않은 것을 가짐adinnādāna
삿된 행위kāmesu micchācāra
거짓말musāvāda
이간하는 말pisuṇavācā
거친 말pharusavācā
쓸데없는 말samphappalāpa
탐내는 마음abhijjhā
악의vyāpāda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
표 3. 열 가지 해로운 행위와 그것을 저지르는 마음(주 21). 빈 동그라미는 주석이 ‘증오의 생각으로도 저질러질 수 있다’고 따로 덧붙인 경우입니다.
주석이 배정한 마음주석이 가능성으로 덧붙인 마음

표를 가로로 읽으면 행위마다 어느 뿌리에서 나오는지가 보입니다. 살생, 거친 말, 악의는 성냄의 두 마음에만 속하고, 삿된 행위와 탐내는 마음은 탐욕의 여덟 마음에만 속합니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일은 대개 탐욕의 여덟 마음으로 하지만, 주석은 증오의 생각으로 훔치는 경우도 있어 9번과 10번 마음일 수도 있다고 덧붙입니다. 거짓말, 이간하는 말, 쓸데없는 말은 탐욕으로도 성냄으로도 할 수 있어 1번부터 10번까지 열 마음에 걸칩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줄입니다. 그릇된 견해라는 해로운 행위는 1·2·5·6번, 곧 입방체의 ‘사견과 결합한’ 면에서만 나옵니다. 제5절에서 읽은 사견의 기준이 여기서 행위의 차원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표를 세로로 읽으면, 이 주석의 배정에서 11번과 12번 마음의 열은 비어 있습니다. 주석은 그 이유를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 이 두 마음이 둔하고 힘이 약하다는 주 20의 설명과 연결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것은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는 추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둡니다.

성자의 길 위에서 사라지는 마음들

전거: 제1장 §4의 주석 22

§4에 붙은 마지막 주석은 이 열두 마음이 네 부류의 성자에게서 어떻게 뿌리 뽑히는지를 정리합니다. 성자의 단계는 열 가지 족쇄(saṃyojana)를 끊어 가는 과정으로 설명되는데, 어떤 족쇄를 끊느냐에 따라 어떤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는지가 정해집니다. 아래 단추로 단계를 옮겨 가며 도형이 어떻게 줄어드는지 보십시오.

1 2 3 4 5 6 7 8 9 10 11 12 탐욕에 뿌리박은 8 성냄 2 어리석음 2

예류자(sotāpanna)는 유신견(sakkāyadiṭṭhi)과 의심(vicikicchā)이라는 두 족쇄를 부수었으므로 1·2·5·6번과 11번 마음을 뿌리 뽑습니다. 괄호 안의 덧붙임에 따르면, 열 족쇄 가운데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도 예류자가 끊습니다. 일래자(sakadāgāmī)는 감각적 욕망(kāmarāga)과 적의(paṭigha)의 족쇄를 약하게 했을 뿐이므로 9번과 10번 마음의 잠재력을 약화합니다. 불환자(anāgāmī)는 그 두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므로 9번과 10번 마음을 뿌리 뽑습니다. 아라한은 남은 다섯 족쇄, 곧 색계에 대한 집착, 무색계에 대한 집착, 자만(māna), 들뜸(uddhacca), 무명(avijjā)까지 뿌리 뽑았으므로 열두 해로운 마음 가운데 어느 것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입방체는 면 단위로 무너진다

이 주석을 입방체 위에 놓으면 기하학적으로 매우 깔끔한 그림이 나옵니다. 예류자가 뿌리 뽑는 1·2·5·6번은 입방체의 한 면, 곧 ‘사견과 결합한’ 면 전체입니다. 유신견의 족쇄가 끊어지면 사견이라는 축의 한쪽 값이 통째로 사라지고, 입방체는 사각형 하나(3·4·7·8번)로 줄어듭니다. 남은 사각형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탐욕의 마음들인데, 제5절에서 본 대로 이곳은 자만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사각형이 사라지는 것은 자만의 족쇄가 끊어지는 아라한의 단계입니다. 성냄의 선분은 일래자에게서 흐려지고 불환자에게서 사라지며, 어리석음의 두 점은 의심의 점이 예류자에게서, 들뜸의 점이 아라한에게서 따로따로 사라집니다.

그러니 불환자에게도 해로운 마음이 다섯 가지 남아 있는 셈입니다. 3·4·7·8번과 12번입니다. 앞 절에서 본 아난다 존자의 눈물도 이 그림 위에 놓을 수 있습니다. 예류자는 아직 성냄의 선분을 지우지 못했으므로, 그 순간의 슬픔은 9번이나 10번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불환자와 아라한에게는 그 선분이 더 이상 없으므로 슬픔이 일어날 자리가 없습니다.

연습 문제

다섯 문항,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 순서. 선택하는 즉시 채점되며, 해설은 펼쳐서 볼 수 있습니다.

맞힌 문항 0 / 5
1

『아비담맛타상가하』와 그 주석에 따를 때, 해로운 세 뿌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

해로운 마음 열두 가지를 함께하는 느낌에 따라 나눌 때, (기쁨 / 불쾌함 / 평온)의 가짓수로 옳은 것은?

3

‘자극’과 관련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4

제1장 §4의 주석 22에 따를 때, 불환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해로운 마음을 빠짐없이 고른 것은? (번호는 §4의 순서를 따른다.)

5

다음 글을 바탕으로 <보기>를 평가한 것으로 옳은 것은?

아비담마는 한 순간의 마음에 어떤 정신 요소들이 함께 일어날 수 있는지를 규칙으로 정한다. 해로운 마음 열두 가지에 번호를 매기면, 탐욕에 뿌리박은 1번부터 8번까지는 느낌, 사견, 자극의 세 기준으로 나뉜다. 1번부터 4번까지는 기쁨과, 5번부터 8번까지는 평온과 함께하고, 1·2·5·6번은 사견과 결합하며 3·4·7·8번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는다. 1번부터 8번까지 가운데 짝수 번호는 자극받은 마음이고 홀수 번호는 자극받지 않은 마음이다. 9번과 10번은 불쾌함과 함께하고 적의와 결합하는데, 9번은 자극받지 않은 마음이고 10번은 자극받은 마음이다. 11번과 12번은 평온과 함께하며, 각각 의심과 들뜸에 결합한다. 이 마음들에 들어가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다음 규칙이 있다.

(가) 사견은 사견과 결합한 네 마음에 언제나 있다. 자만은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탐욕의 네 마음에서만 일어날 수 있되, 그 마음들에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니고 이따금 일어난다. 사견과 자만은 한 마음에 함께 있지 않다.

(나) 해태와 혼침은 자극받은 다섯 마음에서만 일어날 수 있으며, 이따금 일어나되 일어날 때는 반드시 둘이 함께 일어난다.

(다) 질투, 인색, 후회는 적의와 결합한 두 마음에서만 일어날 수 있으며, 이따금 일어나되 저마다 따로 일어난다.

(라) 희열은 해로운 마음 가운데 기쁨과 함께하는 네 마음에만 있다.

<보기>

ㄱ. 어떤 해로운 마음에 자만과 혼침이 함께 있다면, 그 마음은 4번 마음이거나 8번 마음이다.

ㄴ. 적의와 결합한 어떤 마음에 인색이 있다면, 그 마음에는 질투와 후회 가운데 적어도 하나가 함께 있다.

ㄷ. 어떤 해로운 마음에 희열과 해태가 함께 있다면, 그 마음에는 사견과 자만 가운데 정확히 하나가 반드시 있다.

부록: 이번 편의 용어

사이트의 카드 외우기 기능에서 쓸 수 있도록 번호, 원어, 읽기, 분류, 뜻, 용례의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번호원어읽기분류뜻용례
1jāti자띠성질(마음의) 성질, 부류. 해로운·유익한·과보·작용의 넷—
2akusala아꾸살라성질해로운dvādasākusalacittāni
3kusala꾸살라성질유익한. 지혜로 이루어진, 허물없는kosallaṃ vuccati paññā
4kamma깜마성질업.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
5vipāka위빠까성질과보. 업의 결과로 일어나는 마음iṭṭha vipāka, aniṭṭha vipāka
6abyākata아뱌까따성질결정되지 않은 것. 과보와 작용kusalābyākatā
7mūla물라뿌리뿌리aṭṭhadhā lobhamūlāni
8hetu헤뚜뿌리원인, 뿌리hetū akusalā tayo
9lobha로바뿌리탐욕, 집착 (√lubh 달라붙다)lobhasahagatacittāni
10dosa도사뿌리성냄 (√dus 언짢아하다)dosamūlāni ca dvidhā
11paṭigha빠띠가뿌리적의, 맞섬 (paṭi + √gha 치다)paṭighasampayuttaṃ
12moha모하뿌리어리석음, 미혹 (√muh 미혹하다)mohamūlāni ca dve
13momūha모무하뿌리강한 어리석음. 어리석음만을 뿌리로 하는 마음momūhacittāni
14ekahetuka에까헤뚜까뿌리뿌리가 하나인 (마음)dve momūhacittāni ekahetukāni
15dvihetuka드위헤뚜까뿌리뿌리가 둘인 (마음)dvāvīsati dvihetukacittāni
16somanassa소마낫사느낌기쁨, 정신적 즐거움somanassa-sahagataṃ
17domanassa도마낫사느낌불쾌함, 정신적 괴로움domanassasahagataṃ
18upekkhā우뻭카느낌평온, 중립의 느낌upekkhāsahagataṃ
19sahagata사하가따문법함께하는, 동반된lobhasahagata
20sampayutta삼빠윳따문법결합한diṭṭhigatasampayuttaṃ
21vippayutta윕빠윳따문법결합하지 않은diṭṭhigatavippayuttaṃ
22diṭṭhi딧티요소견해. 수식어 없이 쓰이면 사견 (√dis 보다)micchādiṭṭhi
23asaṅkhārika아상카리까요소자극받지 않은, 저절로 일어난asaṅkhārikam ekaṃ
24sasaṅkhārika사상카리까요소자극받은, 부추김을 받은sasaṅkhārikam ekaṃ
25vicikicchā위찌낏차요소의심, 갈피를 잡지 못함vicikicchāsampayuttaṃ
26uddhacca웃닷짜요소들뜸 (u + √dhu 떨다)uddhaccasampayuttaṃ
27māna마나요소자만. 사견과 한 마음에 함께 있지 않음māno catūsu diṭṭhigatavippayuttesu
28thīna-middha티나 밋다요소해태와 혼침. 자극받은 마음에만 함께 일어남thīna-middhaṃ tathā saha
29pāṇātipāta빠나띠빠따행위살생—
30abhijjhā아빗자행위탐내는 마음—
31saṃyojana상요자나성자족쇄. 열 가지—
32sotāpanna소따빤나성자예류자. 흐름에 든 이—
33anāgāmī아나가미성자불환자. 돌아오지 않는 이—
표 4. 제2편 용어 33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