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없는 마음 열여덟, 감각의 창이 열리다『아비담맛타상가하』 제1장 §5 — 뿌리 없이 일어나는 과보와 작용의 마음
지난 편의 해로운 마음 열둘은 모두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라는 뿌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번 편에서 읽는 열여덟 가지 마음은 그런 뿌리가 하나도 없는 마음들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바로 그 순간의 알음알이, 들어온 대상을 받아들이고 살펴보는 짧은 순간들, 마음을 대상 쪽으로 돌려 세우는 순간, 그리고 아라한만이 짓는 미소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 열여덟은 기묘한 대칭을 이룹니다. 해로운 업의 과보 일곱과 유익한 업의 과보 여덟이 거울처럼 마주 보는데, 유익한 쪽에만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제1장 §5의 원문을 읽고, 왜 몸의 감각만이 괴롭거나 즐거울 수 있는지, 왜 거울이 한 칸 어긋나 있는지를 따진 다음, 나라다 장로가 이 자리에서 처음 그려 보이는 인식과정의 열일곱 순간 위에 이 마음들을 하나씩 앉혀 봅니다.
전거
『아비담맛타상가하』 제1장 §5와 그 주석(주 23–27, 인식과정 도해 I). 보충으로 제1장 §6의 첫 게송과 주 34, 제3장 §4(원인의 모음)와 느낌에 관한 주석, 제4장 §9(등록의 규칙)
대본
나라다 장로 편역본의 빠알리 원문과 주석(영역문과 그 안의 인용문은 내용 확인에만 쓰고 인용하지 않음)
시간
약 95분 (본문 60분, 인식과정 탐색 20분, 연습 문제 15분)
거울의 작도. 가운데 세로선을 거울로 삼아 왼쪽 오각형과 두 점이 해로운 과보 일곱, 오른쪽 오각형과 세 점이 유익한 과보 여덟입니다. 오각형의 네모난 꼭짓점은 몸의 알음알이입니다. 오른쪽 아래, 금빛 고리를 두른 점 하나에는 거울 건너편에 짝이 없습니다. 위쪽 삼각형은 작용만 하는 마음 셋입니다.
해로운 과보 7
유익한 과보 8
작용 3
1
‘원인 없음’이란 무엇인가
전거: 제1장 §5의 주석 23, 제3장 §4, 제1장 §6 첫 게송
지난 편에서 우리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해로운 세 뿌리와, 그 반대편의 관대함, 선의, 지혜라는 유익한 세 뿌리를 보았습니다. 아비담마는 이 여섯을 원인(hetu)이라고 부릅니다. 이번 편의 주인공인 열여덟 가지 마음은 이 여섯 원인 가운데 어느 것도 지니지 않은 마음, 곧 원인 없는(ahetuka) 마음입니다.
그런데 ‘원인이 없다’는 말은 자칫 ‘아무 까닭 없이 그냥 일어난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나라다 장로는 주 23에서 바로 이 오해를 막는 데 공을 들입니다. 그는 먼저 경전에서 ‘어떤 원인, 어떤 조건(ko hetu ko paccayo)’처럼 원인과 조건이라는 두 말이 거의 같은 뜻으로 나란히 쓰이는 일이 흔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두 말이 구별되어 특정한 뜻으로만 쓰인다고 합니다. 원인이라는 말은 앞에서 본 여섯 뿌리에만 붙고, 조건(paccaya)은 무언가를 돕는 법(upakāraka dhamma)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나무에 빗댑니다. 나무의 뿌리가 원인이라면, 물이나 거름 같은 것이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hetu원인, 뿌리여섯 뿌리(탐욕·성냄·어리석음, 관대함·선의·지혜)에만 붙는 이름. 나무의 뿌리에 해당합니다.
paccaya조건돕는 법(upakāraka dhamma). 나무에 주는 물과 거름에 해당합니다.
sampayuttaka hetu결합된 원인마음과 함께 일어나 그 마음에 결합해 있는 뿌리. 원인 없는 마음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nibbattaka hetu생겨나게 하는 원인어떤 마음을 일으켜 내는 원인. 원인 없는 마음에도 이것은 있습니다.
주석의 핵심은 마지막 두 칸의 구별입니다. 이 열여덟 가지 마음이 ‘원인 없는’ 마음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 마음과 함께 일어나 결합해 있는 원인(sampayuttaka hetu)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nibbattaka hetu)까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나라다 장로는 분명히 합니다. 예컨대 이번 편에 나오는 과보의 마음들은 과거의 업이 맺은 결과이므로 그것을 낳은 원인이 엄연히 있습니다. 다만 일어나는 그 순간에 탐욕이나 관대함 같은 뿌리를 품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립니다. 원인 없는 마음들은 대체로 약하고 짧은 순간의 마음들인데, 그 성격이 이 비유와 잘 어울립니다.
제3장 §4의 원인의 모음은 이 열여덟이 무엇인지를 이름으로 꼽아 줍니다. 다섯 감각의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 두 쌍의 다섯 알음알이,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 미소 짓는 마음이 그것이고, 나머지 71가지 마음은 모두 원인이 있습니다. 그 71 가운데 둘은 원인이 하나이고(지난 편에서 본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두 마음), 나머지 69는 원인이 둘이거나 셋입니다.
아름답지 않은 서른
원인 없는 마음 열여덟을 다 세고 나면 『상가하』는 다음 단락(§6)을 이런 게송으로 엽니다.
Pāpāhetukamuttāni — sobhanānī ti vuccareEkūnasaṭṭhi cittāni — ath’ ekanavutī pi vā.
악한 것과 원인 없는 것을 뺀 마음들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불리니, 쉰아홉 가지, 또는 아흔한 가지이다.
제1장 §6 첫 게송
이 게송 덕분에 89가지 마음을 가르는 또 하나의 큰 선이 생깁니다. 지난 편의 해로운 마음 열둘과 이번 편의 원인 없는 마음 열여덟을 합한 서른 가지는 ‘아름답지 않은’ 마음이고, 나머지 쉰아홉 가지(121가지로 세면 아흔한 가지)는 ‘아름다운(sobhana)’ 마음입니다. 여기서 원인 없는 마음들이 아름답지 않은 쪽에 들어간다는 데 주의하십시오. 그 가운데 여덟은 유익한 업의 과보이고 하나는 아라한의 미소인데도 그렇습니다. 아비담마에서 ‘아름답다’는 구분은 그 마음이 낳는 결과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 마음이 어떤 요소들과 결합해 있느냐에 따라 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구분이 정확히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는 제4편과 제8편에서 자세히 봅니다.
12해로운
18원인 없는
59아름다운 (sobhana) · 제4–6편
막대 1. 89가지 마음의 첫 번째 큰 분할. 왼쪽의 두 칸(30)이 ‘악한 것과 원인 없는 것’, 나머지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폭은 가짓수에 비례합니다.
2
원문 읽기: 제1장 §5
전거: 제1장 §5 본문과 요약 게송
§5는 원인 없는 마음 열여덟을 세 무리로 나누어 열거합니다. 해로운 업의 과보 일곱, 유익한 업의 과보 가운데 원인 없는 것 여덟, 그리고 원인 없이 작용만 하는 것 셋입니다. 지난 편처럼 원문을 한 줄씩 옮기고 번역을 나란히 두었습니다. 번호는 §5 본문의 괄호 번호 그대로이며, 이번 편에서 마음을 번호로 부를 때는 이 번호를 씁니다. 원문의 tathā는 ‘마찬가지로’라는 뜻으로, 앞 줄에 붙은 느낌(평온)이 뒤의 줄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표시입니다.
1Upekkhāsahagataṃ cakkhuviññāṇaṃ; tathā평온이 함께하는 눈의 알음알이, 마찬가지로
2sotaviññāṇaṃ,귀의 알음알이,
3ghānaviññāṇaṃ,코의 알음알이,
4jivhāviññāṇaṃ,혀의 알음알이,
5Dukkhasahagataṃ kāyaviññāṇaṃ,괴로움이 함께하는 몸의 알음알이,
6Upekkhāsahagataṃ sampaṭicchanacittaṃ,평온이 함께하는 받아들이는 마음,
∴Imāni aṭṭha pi kusalavipākāhetukacittāni nāma.이 여덟 가지를 유익한 과보로서 원인 없는 마음이라고 한다.
16Upekkhāsahagataṃ pañcadvārāvajjanacittaṃ; tathā평온이 함께하는 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 마찬가지로
17manodvārāvajjanacittaṃ,마음의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
18Somanassasahagataṃ hasituppādacittañ cā ti.기쁨이 함께하는 미소를 일으키는 마음.
∴Imāni tīṇi pi ahetukakiriyacittāni nāma.이 세 가지를 원인 없는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Icc’ evaṃ sabbathā pi aṭṭhārasāhetukacittāni samattāni.이와 같이 모두 해서 원인 없는 마음 열여덟 가지가 끝났다.
밑줄 친 말은 평온이 아닌 느낌입니다. 열여덟 가운데 평온이 아닌 느낌과 함께하는 마음은 넷뿐입니다. 괴로움의 5번, 즐거움의 12번, 기쁨의 14번과 18번입니다. 나머지 열넷은 모두 평온과 함께합니다. 지난 편에서 89가지 마음 가운데 괴로움과 함께하는 것도, 즐거움과 함께하는 것도 단 하나뿐이라고 했던 그 둘이 바로 5번과 12번입니다.
세 무리의 이름에도 작은 비대칭이 있습니다. 첫 무리는 그냥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라고 불리는데, 둘째 무리는 ‘유익한 과보로서 원인 없는 마음’이라고 굳이 ‘원인 없는’을 덧붙입니다. 해로운 업의 과보는 이 일곱이 전부여서 모두 원인이 없지만, 유익한 업의 과보에는 원인이 있는 것들(제4편에서 볼 욕계의 아름다운 과보 여덟)도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제6절에서 다시 따집니다.
Sattākusalapākāni — puññāpākāni aṭṭhadhāKriyācittāni tīṇī ti — aṭṭhārasa ahetukā.
해로운 것의 과보가 일곱, 공덕의 과보가 여덟, 작용의 마음이 셋이니, 원인 없는 것은 열여덟이다.
제1장 §5 요약 게송
게송은 산문 본문과 다른 말을 고릅니다. 본문의 ‘유익한(kusala)’ 대신 ‘공덕(puñña)’이라는 말을 쓰고, ‘과보(vipāka)’ 대신 그 줄임꼴 pāka를 씁니다. 운율을 맞추기 위한 선택이지만, 덕분에 우리는 경전에서 자주 만나는 puñña가 아비담마의 kusala와 같은 자리에 놓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
두 쌍의 다섯 알음알이
전거: 제1장 §5의 주석 24
§5의 1–5번과 8–12번은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감각에 각각 하나씩 기대어 일어나는 알음알이이고, 해로운 과보와 유익한 과보로 두 번 나옵니다. 주 24는 그래서 이 열을 ‘두 쌍의 다섯 알음알이(dvipañcaviññāṇa)’라고 부른다고 알려 줍니다. 다섯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섯이고, 해로운 쪽과 유익한 쪽이 짝을 이루기 때문에 두 쌍입니다.
그림 1. 두 쌍의 다섯 알음알이. 두 오각형은 가운데 선을 거울로 서로를 비춥니다. 눈·귀·코·혀의 꼭짓점에는 양쪽 모두 같은 느낌(평온)이 붙고, 몸의 꼭짓점(네모)에서만 느낌이 갈립니다.
이 열 가지 알음알이는 감각 대상을 아는 가장 원초적인 순간입니다. 눈의 알음알이는 보이는 형상을 만나 그것을 ‘보는’ 순간일 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거나 좋다 싫다 평가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합니다. 나라다 장로가 인식과정을 설명하는 주 27에서 쓰는 표현을 빌리면, 눈의 알음알이는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대상에 대해 그 이상은 아직 알지 못합니다.
왜 이 알음알이들이 원인 없는 과보인지도 여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는 순간 자체는 우리가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눈앞에 아름다운 꽃이 나타나든 썩은 시체가 나타나든, 그것을 보는 알음알이는 과거의 업이 맺은 결과로서 일어날 뿐 그 순간에 새로운 업을 짓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 대상을 만나 보게 되는 것은 과거의 해로운 업의 결과이고, 원하는 대상을 만나 보게 되는 것은 과거의 유익한 업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같은 눈의 알음알이가 두 번, 하나는 해로운 과보로 하나는 유익한 과보로 열거되는 것입니다.
주 24는 느낌에 대해서도 한 줄로 설명합니다. 이 다섯 쌍의 알음알이는 비교적 약하기 때문에 중립의 느낌과 함께하는데, 몸의 알음알이만은 예외로 괴로움이나 즐거움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몸인가는 다음 절에서 따로 다룹니다.
4
왜 몸만 아프고 즐거운가
전거: 제3장 느낌의 모음에 붙은 주석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순간은 평온한데, 왜 몸에 닿는 순간만은 괴롭거나 즐거울까요? 나라다 장로는 제3장에서 느낌을 다룰 때 바로 이 물음을 던지고, 『철학 개요(Compendium of Philosophy)』의 서론에 실린 쉐잔 아웅의 설명을 소개합니다. 그 요지를 우리말로 풀면 이렇습니다.
눈, 귀, 코, 혀의 경우에는 감각 기관의 민감한 물질(pasāda rūpa)과 그것이 만나는 대상이 둘 다 몸의 이차적인 성질에 속합니다. 이 둘의 부딪침은 몸에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일으킬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촉의 경우에는 대상이 땅의 요소(paṭhavī, 단단함과 넓이), 불의 요소(tejo, 열기), 바람의 요소(vāyo, 움직임과 압력)라는 일차적인 성질 가운데 하나 또는 전부와 닿고, 이것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몸 안에 있는 같은 일차적 성질들까지 직접 건드릴 만큼 강하다는 것입니다. 물의 요소(āpo, 응집)는 만질 수 없는 것이어서 빠집니다.
모루와 솜
아웅은 이 차이를 대장간의 모루에 빗댑니다. 모루 위에 솜뭉치를 올려놓아도 모루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망치로 그 솜을 내리치면 그 충격이 솜을 지나 모루에까지 전해집니다. 보고 듣는 일은 모루 위의 솜과 같아서 감각 기관의 표면에서 끝나고, 감촉은 망치질과 같아서 몸의 근본 요소에까지 충격이 닿는다는 것입니다. 나라다 장로는 이를 받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경우에는 단순한 부딪침만 있어서 그 결과로 생기는 느낌이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반면, 감촉의 경우에는 부딪침이 강해서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생긴다고 정리합니다.
나라다 장로는 같은 곳에서 예도 듭니다. 부드러운 감촉은 즐거움을, 바늘에 찔리는 것은 괴로움을 낳습니다. 편안한 자리에 앉을 때 우리는 즐거움과 함께하는 몸의 알음알이를 경험하고, 이것은 과거의 좋은 행위의 결과입니다. 모든 형태의 몸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자기 자신의 업이 피할 수 없이 맺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감각의 느낌과 자와나의 느낌은 다르다
여기서 나라다 장로가 특별히 강조하는 미묘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감각 인상이 즐겁든 괴롭든 평온하든, 그것을 조건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흐름, 곧 뒤에서 볼 자와나(javana)의 단계가 반드시 같은 느낌과 함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두 가지 예를 듭니다.
5 → 평온바위 조각에 발을 다친 부처님
바위 조각이 부처님의 발을 쳤을 때 부처님은 괴로움과 함께하는 몸의 알음알이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조건으로 이어지는 자와나는 불쾌함과 함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괴로움에 흔들리지 않고 완전한 평정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나라다 장로는 말합니다. 몸의 괴로움은 과보이고, 그것에 대한 마음의 응답은 별개입니다.
8 → 기쁨부처님을 뵙는 바른 견해의 사람
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부처님을 뵐 때, 그가 경험하는 눈의 알음알이 자체는 평온과 함께하는 유익한 과보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자와나는 유익한 마음이고, 그 안에 깃든 느낌은 기쁨일 것입니다. 보는 순간은 담담하지만, 그 봄에 대한 마음의 응답은 기쁩니다.
이 구별은 수행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몸이 아픈 것, 보기 싫은 것을 보는 것은 과거의 업이 이미 정해 놓은 과보여서 그 순간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과보에 이어지는 마음이 불쾌함과 적의로 응답할지, 평정으로 응답할지는 자와나의 문제이고, 그것은 지금 짓는 업입니다. 지난 편에서 본 불환자와 아라한의 평정, 곧 슬픔이 일어날 자리가 없다는 말도 이 구별 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에게도 몸의 괴로움이라는 과보는 남아 있지만, 그것에 불쾌함으로 응답하는 마음은 더 이상 없습니다.
5
받아들이고, 살피고, 돌아서는 마음
전거: 제1장 §5의 주석 24, 25
다섯 알음알이 다음에 오는 마음들은 감각 하나에 묶이지 않고 그 앞뒤에서 일하는 마음들입니다. 주 25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풀어 줍니다.
sampaṭicchana받아들이는 마음 · 6, 13번대상을 받아들이거나 접수하는 순간의 마음.
santīraṇa조사하는 마음 · 7, 14, 15번받아들인 대상을 살피는 순간의 마음.
pañcadvārāvajjana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 · 16번다섯 감각 대상 가운데 하나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순간.
manodvārāvajjana마음의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 · 17번마음을 정신적 대상 쪽으로 돌리는 순간. 오문 인식과정에서는 결정(votthapana)의 역할도 맡습니다.
āvajjana는 ‘돌리다, 향하게 하다’라는 뜻에서 온 말로, 이 연재에서는 ‘전향’으로 옮깁니다. 바퀴의 축을 돌려 수레의 방향을 바꾸듯, 평소의 잔잔한 흐름에 있던 마음을 새로 나타난 대상 쪽으로 돌려세우는 순간입니다. 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은 다섯 감각의 대상이 나타났을 때, 마음의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은 생각이나 기억 같은 정신적 대상이 나타났을 때 이 일을 합니다. 그리고 주 25는 이 마음의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이 결정(votthapana)의 역할을 맡는다고 덧붙이는데, 그 뜻은 제7절의 인식과정에서 분명해집니다.
범부가 경험하는 단 두 개의 작용
주 25에는 놓치기 쉬운 중요한 정보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과 마음의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은 아라한이 아닌 이들이 경험하는 유일한 두 개의 작용만 하는 마음이고, 다른 모든 작용만 하는 마음은 부처님과 아라한만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편의 첫머리에서 작용만 하는 마음은 업을 짓지 않는 부처님과 아라한의 마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전향의 마음만은 범부에게도 있습니다. 전향은 그저 마음을 대상 쪽으로 돌리는 기능일 뿐이어서 선악의 업이 될 여지가 없고, 업의 결과로 생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과보도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에게서 일어나든 작용으로 분류됩니다.
세 가지 요소로 다시 나누면
주 24는 아비담마가 이 마음들을 요소(dhātu)라는 관점에서 따로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두 쌍의 다섯 알음알이 열 가지는 그대로 ‘두 쌍의 다섯 알음알이’로, 받아들이는 마음 둘과 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을 합한 셋은 ‘마노의 요소(manodhātu)’로, 나머지 76가지는 모두 ‘마노 알음알이의 요소(manoviññāṇadhātu)’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10두 쌍의 다섯 알음알이
3마노 요소
76마노 알음알이의 요소 (manoviññāṇadhātu)
막대 2. 요소의 관점에서 본 89가지 마음. 마노의 요소는 칸이 너무 좁아 실제 비례보다 조금 넓게 그렸습니다. 처음 두 칸의 열세 가지가 모두 이번 편의 원인 없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점을 확인해 보십시오.
이 셈은 인식과정의 구조와 맞물려 있습니다. 다섯 알음알이는 감각 기관에 직접 기대어 일어나고, 마노의 요소 셋(16번 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 6번과 13번 받아들이는 마음)은 바로 그 다섯 알음알이의 앞과 뒤에 붙어 있는 마음들입니다. 다섯 알음알이를 사이에 두고 앞에서 문을 열고, 뒤에서 받아 넘기는 셈입니다. 이 구조가 제7절에서 그림으로 드러납니다. 나라다 장로는 제3장의 한 주석에서 manodhātu라는 이름을 ‘단지 마노일 뿐인 요소(manamatta’ meva dhātu)’, 곧 대상을 겨우 파악하는 정도의 기능을 가진 요소로 풀기도 합니다.
6
일곱과 여덟: 한 칸 어긋난 거울
전거: 제1장 §5, 제1장 §6의 주석 34, 제4장 §9
해로운 과보와 유익한 과보를 나란히 놓으면 거의 완벽한 거울이 됩니다. 다섯 알음알이가 서로를 비추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서로를 비추고, 평온과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이 서로를 비춥니다. 몸의 알음알이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갈리는 것도 거울에 비친 상이 좌우로 뒤집히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유익한 쪽에만 기쁨과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14번)이 하나 더 있고, 해로운 쪽에는 그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해로운 과보 7
유익한 과보(원인 없는 것) 8
1눈의 알음알이 · 평온
⟷
8눈의 알음알이 · 평온
2귀의 알음알이 · 평온
⟷
9귀의 알음알이 · 평온
3코의 알음알이 · 평온
⟷
10코의 알음알이 · 평온
4혀의 알음알이 · 평온
⟷
11혀의 알음알이 · 평온
5몸의 알음알이 · 괴로움
⟷
12몸의 알음알이 · 즐거움
6받아들이는 마음 · 평온
⟷
13받아들이는 마음 · 평온
7조사하는 마음 · 평온
⟷
15조사하는 마음 · 평온
짝 없음
✕
14조사하는 마음 · 기쁨
기쁨의 조사하는 마음은 언제 일어나는가
14번 마음이 어떤 경우에 일어나는지는 제4장에서 인식과정의 규칙을 다룰 때 나옵니다. 제4장 §9에 따르면, 대상이 원하지 않는 것이면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섯 알음알이,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등록하는 마음은 모두 해로운 과보이고, 대상이 원하는 것이면 모두 유익한 과보입니다. 그리고 대상이 매우 원하는 것일 때에는 조사하는 마음과 등록하는 마음이 기쁨과 함께합니다. 그러니 대상의 바람직함은 세 단계로 나뉘는 셈이고, 해로운 과보의 조사하는 마음은 하나, 유익한 과보의 조사하는 마음은 둘이 됩니다.
왜 불쾌함의 조사하는 마음은 없는가
그렇다면 거울을 완성하려면 해로운 쪽에도 ‘매우 원하지 않는 대상’을 만났을 때의 조사하는 마음, 곧 불쾌함과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본문과 주석은 이 물음을 직접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 편에서 읽은 사실 하나로 답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89가지 마음 가운데 불쾌함과 함께하는 마음은 적의와 결합한 두 마음(지난 편의 9·10번)뿐이었고, 불쾌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적의가 있었습니다. 적의는 해로운 마음부수이므로, 불쾌함과 함께하는 마음은 반드시 해로운 마음, 곧 업이 됩니다. 과보의 마음이 불쾌함과 함께하는 일은 그래서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거울이 한 칸 어긋난 것은 느낌의 규칙이 강요하는 결과입니다. 다만 이것은 두 규칙을 엮어 낸 추론이지 본문이 직접 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 둡니다.
열여섯 대 일곱
나라다 장로는 §6의 주석(주 34)에서 이 비대칭을 더 큰 그림으로 보여 줍니다. 욕계의 유익한 마음 여덟에 대응하는 과보는 원인이 있는 아름다운 과보 여덟과 원인 없는 과보 여덟을 합해 열여섯인데, 해로운 마음 열둘에 대응하는 과보는 원인 없는 과보 일곱뿐이라는 것입니다. 해로운 업은 열두 가지로 더 다양하지만 그 과보는 일곱 가지 순간에 그치고, 유익한 업은 여덟 가지지만 그 과보는 열여섯 가지 순간으로 펼쳐집니다. 해로운 업의 과보에는 원인이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 곧 해로운 업이 탐욕이나 성냄을 품은 과보의 마음을 낳지는 않는다는 점도 이 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7
열일곱 순간: 인식과정의 첫 그림
전거: 제1장 §5의 주석 27과 도해 I, 제4장 §9
지금까지 따로따로 본 마음들이 실제로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나라다 장로는 §5의 마지막 주석(주 27)에서 아직 제4장에 이르지 않은 독자를 위해 인식과정(vīthi)의 전체 그림을 미리 펼쳐 보입니다. 원인 없는 마음 열여덟 가운데 여러 개가 바로 이 과정의 마디마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그 설명을 따라간 것입니다. 자세한 규칙은 제10편에서 제4장을 읽을 때 다룹니다.
깊이 잠들어 있을 때처럼 마음이 바깥 대상에 응답하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를 바왕가(bhavaṅga)라고 합니다. ‘존재(bhava)의 구성 요소(aṅga)’라는 뜻으로, 한 생을 이어 주는 바탕의 흐름입니다. 대상이 마음에 들어오면 이 흐름이 한 순간 흔들리고 사라지며, 이어 그 흐름이 끊어집니다. 그러면 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면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멈추고 대상 쪽으로 돌려세웁니다. 곧바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그것은 대상에 대해 그 이상은 아직 알지 못합니다. 이 감각 작용 뒤에 본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오고, 이어 받아들인 대상을 잠깐 살피는 조사의 순간이 옵니다. 그다음이 결정(votthapana)의 단계입니다. 나라다 장로는 여기서 가려냄이 행해지고 자유의지가 제 몫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 직후에 심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단계인 자와나(javana)가 일어납니다. 행위가 유익한지 해로운지가 판가름 나는 것이 이 단계이고, 업이 지어지는 것도 이 단계입니다. 바르게 숙고하면(yoniso manasikāra) 자와나는 유익해지고, 그릇되게 숙고하면(ayoniso manasikāra) 해로워집니다. 아라한의 경우 이 자와나는 유익하지도 해롭지도 않은 작용만 하는 마음입니다. 자와나는 대개 일곱 순간 이어지고, 죽음의 순간에는 다섯 순간 이어집니다. 극히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이 과정 전체는 두 순간 동안의 등록하는 마음(tadālambana)으로 끝나며, 그렇게 하여 열일곱 순간으로 하나의 인식과정이 완성됩니다.
열일곱 순간을 직접 짚어 보기
아래 띠는 주 27의 도해 I을 옮긴 것입니다. 위의 단추로 감각의 문과 대상의 바람직함, 그리고 그 과정을 겪는 사람이 범부인지 아라한인지를 바꿔 보십시오. 띠의 각 칸에는 그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의 §5 번호가 적히고, 칸을 누르면 그 순간의 설명이 아래에 나타납니다. 칸의 색은 성질을 나타냅니다. 오른쪽 위에 금빛 마름모가 붙은 칸은 그 자리를 반드시 원인 없는 마음이 맡는 순간이고, 테두리만 있는 마름모는 원인 없는 마음이 맡을 수도 있는 순간입니다.
감각의 문
대상
겪는 이
바왕가전향오식받음조사결정자와나등록
해로운 과보유익한 과보작용업(유익하거나 해로운 마음)
띠를 조작해 보면 몇 가지 규칙이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 전향에서 결정까지 다섯 순간은 어떤 경우에도 원인 없는 마음이 맡습니다. 그 가운데 양 끝의 둘(16번과 17번)은 작용이고, 가운데 셋은 과보입니다. 둘째, 대상을 ‘원하지 않음’에서 ‘원함’으로 바꾸면 가운데 세 칸과 등록의 칸이 한꺼번에 해로운 과보에서 유익한 과보로 바뀝니다. 대상의 바람직함이 과거의 어떤 업이 지금 익는지를 드러내는 셈입니다. 셋째, ‘매우 원함’으로 바꾸면 조사의 칸만 15번에서 14번으로 바뀌고 느낌이 기쁨이 됩니다. 넷째, 몸의 문을 고르면 오식의 칸에서만 느낌이 괴로움이나 즐거움으로 바뀌고, 나머지 칸들의 느낌은 그대로입니다. 마지막으로, 겪는 이를 아라한으로 바꾸어도 바뀌는 것은 자와나뿐입니다. 아라한도 과거 업의 과보는 그대로 받는다는 것, 그러나 그에 대한 응답은 더 이상 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한 줄의 띠에 담겨 있습니다.
한 과정 안의 세 성질
나라다 장로는 주 27의 끝에서 이 그림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바왕가 세 순간은 과보입니다. 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은 작용입니다. 다섯 알음알이는 열 가지 유익하거나 해로운 과보 가운데 하나이고, 받아들이는 마음과 조사하는 마음도 과보입니다. 결정의 역할을 하는 마음의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은 작용입니다. 일곱 자와나는 업입니다. 등록하는 마음은 세 조사하는 마음이나 욕계의 아름다운 과보 여덟 가운데 하나로서 과보입니다. 그러니 하나의 인식과정 안에서도 업, 과보, 작용이 차례로 섞여 일어납니다. 지난 편의 첫 절에서 배운 네 가지 성질이 한 줄의 띠 위에 모두 나타나는 것입니다.
8
아라한의 미소
전거: 제1장 §5의 주석 26
열여덟 번째 마음, 미소를 일으키는 마음(hasituppāda)은 원인 없는 마음 가운데 가장 특이합니다. 주 26은 이것이 아라한에게만 있는 마음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웃음은 즐거운 느낌 때문에 일어나므로 이 마음은 기쁨과 함께하며, 이 마음 안에는 단지 즐거움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탐욕도 관대함도 지혜도 없이, 오직 가벼운 기쁨만으로 짓는 미소입니다.
주 26은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람의 부류에 따라 어떤 마음으로 웃을 수 있는지를 정리합니다. 웃음을 일으킬 수 있는 마음은 모두 열세 가지입니다.
웃는 이
1탐욕
2탐욕
3탐욕
4탐욕
1유익
2유익
3유익
4유익
1작용
2작용
3작용
4작용
18미소
수
범부puthujjana
8
예류자·일래자·불환자
6
아라한·벽지불
5
정등각자sammāsambuddha
2
표 1. 웃음을 일으키는 열세 가지 마음(주 26). ‘탐욕 1–4’는 지난 편의 기쁨과 함께하는 탐욕의 마음 네 가지, ‘유익 1–4’와 ‘작용 1–4’는 제4편에서 읽을 욕계의 아름다운 마음 가운데 기쁨과 함께하는 유익한 마음 넷과 작용만 하는 마음 넷입니다. 유익과 작용 무리의 1·2번은 지혜와 결합한 것이고, 탐욕 무리의 1·2번은 사견과 결합한 것입니다.
표를 가로로 읽으면 수행의 단계가 웃음의 모양을 바꾸는 과정이 보입니다. 범부는 기쁨과 함께하는 탐욕의 마음 넷이나 기쁨과 함께하는 유익한 마음 넷으로 웃습니다.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는 탐욕의 마음 가운데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둘(지난 편의 3번과 4번)이나 유익한 마음 넷으로 웃습니다. 지난 편의 제12절에서 예류자가 사견과 결합한 탐욕의 마음을 뿌리 뽑는다고 했던 것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기쁨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작용의 마음 넷이나 이번 편의 18번 마음으로 웃습니다. 그리고 정등각자 곧 부처님은 그 가운데 지혜와 결합한 두 작용의 마음으로만 미소 짓습니다.
세로로 세어 보면 4 + 4 + 4 + 1 = 13입니다. 18번 마음은 아라한과 벽지불의 줄에만 점이 찍혀 있습니다. ‘아라한에게만 있는 마음’이라는 말의 뜻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줄에는 이 칸이 비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부처님의 미소는 언제나 지혜와 결합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 웃음
나라다 장로는 이어서 『철학 개요』가 소개하는 불교 문헌의 여섯 가지 웃음을 인용합니다. 그 내용을 풀어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sita첫째표정과 낯빛에만 드러나는 미소.
hasita둘째입술이 살짝 움직여 이끝이 겨우 보이는 미소.
vihasita셋째가벼운 소리를 내는 웃음.
upahasita넷째머리와 어깨와 팔이 함께 움직이는 웃음.
apahasita다섯째눈물이 나는 웃음.
atihasita여섯째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앞뒤로 흔들리는 폭소.
같은 인용문은 웃음이 몸의 표현(kāyaviññatti)의 한 형태이고, 말의 표현(vacīviññatti)이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앞의 둘은 교양 있는 이들의 웃음, 가운데 둘은 보통 사람의 웃음, 마지막 둘은 낮은 부류의 존재들의 웃음이라고 분류합니다. 몸의 표현이라는 말은 첫 편에서 마음부수를 정의할 때 잠깐 스쳐 간 적이 있습니다. 미소 하나도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이 일으킨 물질로서 분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그 자세한 내용은 제13편에서 물질을 읽을 때 보게 됩니다.
9
연습 문제
다섯 문항,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 순서. 선택하는 즉시 채점되며, 해설은 펼쳐서 볼 수 있습니다.
맞힌 문항 0 / 5
1
원인 없는 마음 열여덟 가지를 (해로운 과보 / 유익한 과보 / 작용)으로 나눈 가짓수로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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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③. 요약 게송 그대로입니다(sattākusalapākāni, puññāpākāni aṭṭhadhā, kriyācittāni tīṇi). 해로운 과보는 다섯 알음알이와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하나로 일곱이고, 유익한 과보는 같은 일곱에 기쁨과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이 더해져 여덟이며, 작용은 두 전향의 마음과 미소를 일으키는 마음으로 셋입니다.
①은 해로운 쪽과 유익한 쪽을 뒤바꾼 것입니다. 거울에서 한 칸이 더 있는 쪽은 유익한 쪽입니다. ④는 미소를 일으키는 마음을 ‘작용’으로 세면서 기쁨의 조사하는 마음을 빠뜨린 셈입니다.
2
원인 없는 마음 열여덟 가지 가운데 기쁨(somanassa)과 함께하는 마음은 몇 가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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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②. 기쁨과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14번)과 미소를 일으키는 마음(18번)의 두 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실수는 즐거움과 함께하는 몸의 알음알이(12번)를 함께 세어 ③을 고르는 것입니다. 지난 편에서 본 대로 기쁨(somanassa)은 정신적인 느낌이고 즐거움(sukha)은 몸의 느낌으로, 둘은 다섯 가지 느낌 가운데 서로 다른 칸에 듭니다. 열여덟 가운데 평온이 아닌 느낌과 함께하는 것은 넷(5·12·14·18번)이지만, 그 가운데 기쁨은 둘뿐입니다.
3
원인 없는 마음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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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①. 주 26은 미소를 일으키는 마음이 아라한에게만 있는 마음이라고 밝힙니다.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는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기쁨의 탐욕의 마음 둘이나 기쁨의 유익한 마음 넷으로 웃습니다. 18번 마음이 원인 없는 ‘작용’의 마음이라는 점에서도, 업을 짓는 성자인 유학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② 주 23의 핵심입니다. ③ 주 24의 요소 분류입니다. ④ 주 25와 주 27이 모두 이렇게 말합니다. ⑤ 주 25의 설명 그대로입니다. 다른 모든 작용만 하는 마음은 부처님과 아라한만 경험합니다.
4
주 26에 따를 때, 불환자가 웃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은 모두 몇 가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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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④.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는 사견과 결합하지 않고 기쁨과 함께하는 탐욕의 마음 둘(지난 편의 3번과 4번)과 기쁨과 함께하는 유익한 마음 넷으로 웃을 수 있어, 모두 여섯 가지입니다.
이 문항은 지난 편의 내용과 맞물려 있습니다. 예류자는 사견과 결합한 탐욕의 마음(1·2·5·6번)을 뿌리 뽑았으므로 1번과 2번으로는 웃을 수 없고, 3번과 4번은 아라한이 되어서야 사라지므로 불환자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⑤의 여덟은 범부의 경우이고, ③의 다섯은 아라한과 벽지불의 경우이며, ①의 둘은 부처님의 경우입니다.
5
다음 글을 바탕으로 <보기>를 평가한 것으로 옳은 것은?
다섯 감각의 문 가운데 하나에 대상이 나타나 끝까지 이어지는 인식과정은 다음 순서를 밟는다. 바왕가가 흔들리고 끊어진 뒤 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 다섯 알음알이 가운데 하나,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이 차례로 한 순간씩 일어나고, 이어 자와나가 일곱 순간, 등록하는 마음이 두 순간 일어난다. 이 과정에 관해 다음이 알려져 있다.
(가) 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은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결정하는 일은 마음의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이 맡는데, 이 마음 역시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나) 다섯 알음알이,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등록하는 마음은 과보의 마음이다. 대상이 원하지 않는 것이면 이들은 모두 해로운 과보이고, 원하는 것이면 모두 유익한 과보이다. 대상이 매우 원하는 것이면 조사하는 마음과 등록하는 마음은 기쁨과 함께한다.
(다) 해로운 과보인 조사하는 마음은 평온과 함께하는 것 하나뿐이다. 몸의 알음알이는 해로운 과보일 때는 괴로움과, 유익한 과보일 때는 즐거움과 함께하며, 나머지 네 알음알이와 받아들이는 마음은 평온과 함께한다.
(라) 자와나는 업이 지어지는 단계로서, 그 느낌은 앞선 감각 인상의 느낌과 반드시 같지는 않다.
<보기>
ㄱ. 몸의 알음알이가 괴로움과 함께한 과정이라면, 그 과정의 조사하는 마음은 평온과 함께한다.
ㄴ. 조사하는 마음이 기쁨과 함께한 과정이라면, 그 과정의 자와나도 기쁨과 함께한다.
ㄷ. 어떤 과정에서든, 다섯 문으로 전향하는 마음부터 결정하는 마음까지의 다섯 순간 가운데 과보의 마음은 정확히 세 순간이다.
해설 펼치기
정답 ③. 이 문항은 한 순간의 정보에서 같은 과정의 다른 순간에 대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끌어낼 수 없는 경우를 알아보는지를 묻습니다.
ㄱ (옳음). (다)에 따라 괴로움과 함께하는 몸의 알음알이는 해로운 과보입니다. (나)에 따라 과보의 마음들은 한 과정 안에서 모두 해로운 과보이거나 모두 유익한 과보이므로, 몸의 알음알이가 해로운 과보이면 대상은 원하지 않는 것이고 조사하는 마음도 해로운 과보입니다. (다)에 따라 해로운 과보인 조사하는 마음은 평온과 함께하는 것뿐이므로 결론이 성립합니다. 띠의 탐색기에서 ‘몸’과 ‘원하지 않음’을 고르면 조사의 칸이 7번이 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ㄴ (옳지 않음). 조사하는 마음이 기쁨과 함께했다면 대상이 매우 원하는 것이라는 데까지는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에 따라 자와나의 느낌은 앞선 감각 인상의 느낌과 반드시 같지 않습니다. 매우 원하는 대상 앞에서도 평온한 자와나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제4절의 두 사례가 보여 준 요점입니다.
ㄷ (옳음). (가)에 따라 첫 순간(전향)과 마지막 순간(결정)은 작용입니다. (나)에 따라 가운데 세 순간(알음알이, 받아들임, 조사)은 대상이 어떻든 과보입니다. 해로운 과보인지 유익한 과보인지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지만, 과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으므로 ‘어떤 과정에서든 정확히 세 순간’이 성립합니다.
따라서 옳은 것은 ㄱ과 ㄷ입니다.
10
부록: 이번 편의 용어
사이트의 카드 외우기 기능에서 쓸 수 있도록 번호, 원어, 읽기, 분류, 뜻, 용례의 순서로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