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와다 불교 입문 둘째 편

제2부 진리의 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Cattāri Ariyasaccāni

붓다 가르침의 뼈대

첫 설법을 기리는 법의 바퀴(dhammacakka)를 본뜬 무늬. 바퀴살 열둘은 네 가지 진리를 세 번 굴린 열두 가지 모습을 나타낸다.

첫째 편에서 우리는 붓다가 “예전에도 지금도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칠 뿐”이라고 말한 것을 보았다. 이 한마디를 조금 더 펼치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곧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가 된다. 괴로움이 있다는 것, 그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 원인이 사라지면 괴로움도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원인을 사라지게 하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붓다가 깨달은 밤에 꿰뚫어 본 것도 이것이었고, 사슴 동산에서 처음 굴린 법의 바퀴도 이것이었으며, 마흔다섯 해 동안 설한 수많은 가르침도 결국 이 네 가지로 되돌아온다. 이 강좌에서 앞으로 다룰 오온과 삼특상과 연기는 첫째 진리와 둘째 진리를 자세히 편 것이고, 보시와 계와 수행은 넷째 진리를, 해탈은 셋째 진리를 편 것이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붓다 가르침의 뼈대이자 이 강좌 전체의 뼈대이기도 하다. 이 편에서는 붓다의 첫 설법인 「초전법륜경」을 길잡이로 삼아 네 가지 진리를 하나씩 살펴보고, 그 진리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붓다 자신의 설명을 함께 짚어 본다.

Cattārimāni, bhikkhave, ariyasaccāni. Katamāni cattāri? Dukkhaṃ ariyasaccaṃ,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Imāni kho, bhikkhave, cattāri ariyasaccāni tathāni avitathāni anaññathāni; tasmā ‘ariyasaccānī’ti vuccanti.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참된 것이며, 참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참됨 경」, SN 56.27

예상 학습 시간 약 75분. 본문 여덟 절, 이해도 점검 다섯 문제, 용어 카드 서른 장.

초전법륜과 중도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가장 먼저 법을 전하러 찾아간 이들은 바라나시 근처 이시빠따나의 사슴 동산(Migadāya)에 머물던 다섯 수행자였다.1 그 자리에서 설한 첫 설법을 전하는 경이 「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SN 56.11)이다. 경의 이름은 ‘법’(dhamma)의 ‘바퀴’(cakka)를 ‘굴려 나아가게 함’(pavattana)이라는 뜻이다. 옛 인도에서 바퀴를 굴린다는 것은 전륜성왕이 온 세상에 다스림을 펼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는데, 붓다는 무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에 새 질서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dhamma법, 진리
붓다가 깨달은 것
cakka바퀴
굴러가며 나아가는 것
pavattana굴림
움직여 나아가게 함
Dhammacakkappavattana법의 바퀴를 굴림
곧 첫 설법, 초전법륜(初轉法輪)

그런데 이 경은 사성제를 곧바로 말하지 않는다. 먼저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두 극단부터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그 다섯 수행자는 얼마 전까지 붓다와 함께 고행을 닦던 동료들이었다. 그런데 붓다가 고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알고 고행을 버린 채 음식을 받아 먹자, 그들은 붓다가 타락하여 사치스러운 삶으로 돌아갔다며 그를 떠났다. 그들에게 수행이란 곧 몸을 괴롭히는 일이었고, 고행을 그만둔다는 것은 곧 쾌락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붓다의 첫마디는 바로 그 생각, 곧 쾌락이 아니면 고행이고 고행이 아니면 쾌락이라는 생각을 바로잡는 데서 시작한다.

Dve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Katame dve? Yo cāyaṃ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ṃhito, yo cāyaṃ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ṃhito. Ete kho,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서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부의 것이며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데 몰두하는 것은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익을 주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 두 극단에 다가가지 않고 여래가 완전히 깨달은 중도는 눈을 만들고 앎을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끈다.

「초전법륜경」, SN 56.11

감각적 쾌락에 탐닉함kāmasukhallikānuyoga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서 즐거움을 찾아 거기에 빠져 지내는 삶. 붓다가 출가 전 궁전에서 누린 삶이다.

경의 평가: 저열하고(hīna), 촌스럽고(gamma), 범부의 것이며(pothujjanika), 성스럽지 못하고(anariya), 이익을 주지 못한다(anatthasaṃhita).

자신을 괴롭히는 데 몰두함attakilamathānuyoga

몸을 혹독하게 다루면 마음이 정화된다고 믿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삶. 붓다가 숲에서 뼈만 남을 만큼 몰두한 고행이다.

경의 평가: 괴롭고(dukkha), 성스럽지 못하며(anariya), 이익을 주지 못한다(anatthasaṃhita).

두 극단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붓다 자신이 몸소 거쳐 온 길이었다. 궁전에서 누린 쾌락도, 숲에서 뼈만 남을 만큼 몰두한 고행도 괴로움의 끝으로 데려다주지 못했다. 경이 두 극단에 공통으로 붙이는 평가는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쪽은 즐겁고 다른 쪽은 괴롭다는 차이가 있을 뿐, 둘 다 해탈이라는 목적에는 쓸모가 없다는 점에서 같다.

그래서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는 두 길의 중간쯤을 적당히 걷는다는 뜻이 아니다. 쾌락을 조금 누리고 고행도 조금 하는 절충이나, 무엇이든 너무 지나치지 않게 하라는 처세의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쾌락과 고행이라는 두 길은 겉보기에 정반대이지만, 둘 다 몸이라는 대상에 매여 있다는 점에서 같은 축 위에 놓여 있다. 한쪽은 몸을 즐겁게 하여, 다른 쪽은 몸을 괴롭혀서 무언가를 얻으려 한다. 중도는 그 축 위의 한 지점이 아니라 방향이 아예 다른 길이다. 경이 중도를 설명하는 방식도 이를 보여 준다. 중도는 ‘무엇과 무엇의 사이’로 정의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낳는가, 곧 눈과 앎을 만들고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끈다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림 2-1두 극단과 중도

몸이라는 대상에 매인 축 쾌락 탐닉 kāmasukha- 고행 attakilamatha- 두 극단의 ‘중간 지점’은 중도가 아니다 중도 = 여덟 요소의 성스러운 길 majjhimā paṭipadā 열반 고요함 · 최상의 지혜 · 바른 깨달음

중도는 쾌락과 고행을 반씩 섞은 것이 아니다. 두 극단은 몸을 즐겁게 하느냐 괴롭히느냐의 차이일 뿐 같은 축 위에 있고, 중도는 그 축을 벗어나 눈과 앎을 만들며 열반으로 향하는 다른 방향의 길이다.

붓다는 곧이어 그 중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힌다. “그것은 바로 여덟 요소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이니, 곧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중도는 곧 팔정도이며, 팔정도는 뒤에서 볼 넷째 진리이다. 붓다가 쾌락과 고행을 모두 떠난 길을 ‘중도’라는 막연한 이름으로 남겨 두지 않고 곧바로 여덟 가지 구체적인 요소로 풀어 보인 것은, 그것이 사색의 대상이 아니라 누구나 실제로 걸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경의 흐름과 이 편의 순서

「초전법륜경」은 이렇게 중도를 앞세운 뒤에 네 가지 진리를 차례로 설하고, 그것을 세 번 굴린 열두 가지 모습으로 알았을 때 비로소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는 붓다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 편의 순서도 이 경의 순서를 따른다. 경 전체의 흐름을 먼저 한눈에 보아 두면 뒤의 절들이 어디쯤에 놓이는지 알기 쉽다.

그림 2-2「초전법륜경」의 흐름

  1. 두 극단을 떠나라감각적 쾌락의 탐닉과 자기 학대의 고행을 모두 멀리한다. (제1절)
  2. 중도는 여덟 요소의 성스러운 길이다눈과 앎을 만들고 열반으로 이끄는 길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제1절)
  3.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한다괴로움, 괴로움의 일어남, 괴로움의 소멸, 소멸로 이끄는 길. (제2절~제6절)
  4. 세 번 굴린 열두 가지 모습을 밝힌다각 진리를 알고, 해야 할 일을 알고, 그 일을 이루었음을 안다. (제7절)
  5. 깨달음을 선언한다열두 가지 앎이 완전히 청정해졌을 때 비로소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선언했다고 고백한다. (제7절)
  6. 꼰단냐가 법의 눈을 얻는다설법을 들은 꼰단냐가 첫 제자로서 흐름에 든 이가 된다. (제2절)
  7. 법의 바퀴가 굴려졌다는 외침이 울린다땅의 신들부터 범천의 신들까지 온 세계가 환희로 응답한다. (제8절)

이 흐름 속에서 네 가지 진리가 강좌 전체와 어떻게 이어지는지도 함께 그려 두자. 앞으로 만날 여러 편은 모두 이 네 기둥 가운데 어느 하나를 자세히 펼친 것이다.

그림 2-3사성제와 이 강좌의 짜임

첫째 진리괴로움dukkha
둘째 진리일어남samudaya
셋째 진리소멸nirodha
넷째 진리길magga
3·4·5편오온·12처·18계, 무상·괴로움·무아, 12연기괴로움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자세히 편다
13편해탈괴로움이 소멸한 경지와 성자의 단계
9~12편보시·계·수행·위빳사나소멸로 이끄는 길을 실제로 걷는다

지금 읽고 있는 둘째 편은 네 기둥 전체를 한꺼번에 세워 보는 자리다. 이후의 편들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이 가운데 어느 기둥을 펼친 것인지를 떠올리면 공부의 방향을 잃지 않는다.

  1. 이시빠따나(Isipatana)는 오늘날 인도 바라나시 북쪽의 사르나트(Sarnath)로, 붓다가 처음 법을 설한 곳이라 하여 네 곳의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의 뜻

사성제라는 말의 원어 ariyasacca는 ‘성스러운’을 뜻하는 ariya와 ‘진리’를 뜻하는 sacca가 합쳐진 것이다. 두 낱말을 하나씩 살펴보면 이 가르침이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드러난다.

ariya성스러운, 고귀한
성자(聖者)와 관련된
sacca진리, 참된 것
있는 그대로인 것
ariyasacca성스러운 진리
한역으로 성제(聖諦)

진리, 붓다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

sacca는 ‘있는 그대로’, ‘참된 것’이라는 뜻이다. 표지에 실은 「참됨 경」은 네 가지 진리를 세 낱말로 설명한다. 참되고(tatha), 참되지 않은 것이 아니며(avitatha), 다른 것이 아니다(anaññatha). 같은 말을 긍정으로 한 번, 부정으로 두 번 되풀이한 이 표현은 네 가지 진리가 사실과 어긋나는 데가 없고, 때와 곳에 따라 다른 것으로 바뀌지도 않는다는 것을 힘주어 말한다.

이 점에서 네 가지 진리는 붓다가 만들어 낸 교리가 아니다. 괴로움이 있고 그것이 갈애에서 일어나며 갈애가 사라지면 괴로움도 사라진다는 것은,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든 하지 않든 언제나 그러한 사실이다. 붓다는 그것을 발견하고 드러내어 알려 주었을 뿐이다. 그런 뜻에서 사성제는 이미 있는 땅을 그린 지도와 같다. 지도를 그린 사람이 산과 강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지도가 없으면 우리는 숲속에서 길을 찾지 못한다.

왜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렇다면 왜 그냥 진리가 아니라 ‘성스러운’ 진리라고 부르는가? 『청정도론』 제16장은 이 낱말이 네 가지 뜻에서 그렇게 불린다고 풀이한다.

첫째 뜻성스러운 분이 드러낸 진리

성스러운 분인 붓다가 꿰뚫어 알고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둘째 뜻성자들이 아는 진리

성스러운 이들, 곧 성자들이 꿰뚫어 아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셋째 뜻성자로 만드는 진리

이것을 꿰뚫어 알면 성자가 되기 때문이다. 넷 가운데 특히 중요한 뜻이다.

넷째 뜻그 자체로 성스러운 진리

그릇되거나 속이는 것이 아닌, 참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셋째 뜻이 특히 중요하다. 사성제는 아는 사람을 성자로 만드는 진리이다. 지식은 대개 아는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성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성제는 그것을 꿰뚫어 아는 순간 아는 사람 자신이 달라지는 진리다. 첫째 편에서 본 네 쌍 여덟 부류의 성자는 모두 이 진리를 꿰뚫어 앎으로써 성자가 된 이들이다.

이를 가장 먼저 보여 준 이가 다섯 수행자 가운데 한 사람인 꼰단냐였다. 첫째 편에서도 잠시 보았듯이, 「초전법륜경」은 설법이 이어지는 동안 꼰단냐에게 티끌 없고 때 없는 법의 눈이 생겼다고 전한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n’ti.

일어나기 마련인 것은 무엇이든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

「초전법륜경」, SN 56.11

이것이 흐름에 든 이, 곧 수다원이 얻는 ‘법의 눈’(dhammacakkhu)이다. 경은 이때 붓다가 “꼰단냐는 참으로 알았다, 꼰단냐는 참으로 알았다”(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고 감흥을 드러냈고, 그 뒤로 그가 ‘안 꼰단냐’, 곧 안냐시꼰단냐(Aññāsikoṇḍañña)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첫 설법을 듣고 첫 성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사성제가 듣고 이해하는 데서 그치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성자로 바꾸어 놓는 진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의사의 비유

『청정도론』은 또 네 가지 진리가 이 순서로 설해진 까닭을 의사의 비유로 설명한다. 훌륭한 의사는 먼저 병이 무엇인지를 진단하고, 그 병의 원인을 찾으며, 병이 나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 상태에 이르게 하는 약을 처방한다. 마찬가지로 붓다는 괴로움이라는 병, 갈애라는 병의 원인, 열반이라는 병의 나음, 팔정도라는 약을 차례로 설하였다.

그림 2-4의사의 비유로 본 네 가지 진리

진단병괴로움의 진리무엇이 아픈가
병인병의 원인일어남의 진리왜 아픈가: 갈애
예후병의 나음소멸의 진리나을 수 있는가: 열반
처방약도의 진리어떻게 낫는가: 팔정도

의사가 병명을 말해 주는 것은 환자를 절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고치기 위해서다. 네 단계 가운데 어느 하나만 빠져도 치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비유는 사성제가 어떤 성격의 가르침인지를 잘 보여 준다. 사성제는 세계가 왜 존재하는가, 우주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괴로움이라는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처방이다. 첫째 편에서 본 독화살의 비유가 말하듯, 화살을 맞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화살을 쏜 사람의 이름이나 활의 재질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화살을 뽑고 상처를 치료하는 일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 붓다는 네 가지 진리를 설한 뒤, 각각의 진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곧 각 진리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곧바로 덧붙인다. 이에 대해서는 제7절에서 살펴본다.

괴로움의 진리

첫째 진리는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dukkha ariyasacca)다. 한역으로는 고성제(苦聖諦)라고 한다. 「초전법륜경」은 이를 이렇게 설한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ṃ ariyasaccaṃ –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byādhipi dukkho, maraṇampi dukkhaṃ,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 saṃ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음도 괴로움이고, 병도 괴로움이고,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인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다.

「초전법륜경」, SN 56.11

둑카라는 말

‘괴로움’으로 옮긴 dukkha는 사성제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말이다. 일상어에서 이 말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뜻하며, 이 뜻에서라면 ‘괴로움’이라는 우리말이 잘 맞는다. 그러나 붓다는 이 말을 그보다 훨씬 넓게 썼다. 위의 정형구에서 태어남이나 늙음이 괴로움이라는 말은 그것이 늘 고통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날은 대개 기쁜 날이고, 나이 드는 것에도 나름의 평화가 있다. 그런데도 붓다가 이것들을 괴로움이라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

du경멸할 만한, 비천한
여러 위험의 터전이므로
kha비어 있는
영원함·아름다움·행복·자아가 없으므로
dukkha결함이 있고 의지할 만하지 않은 것
(『청정도론』 제16장의 풀이)

『청정도론』은 dukkha의 접두어 du가 ‘경멸할 만한’, ‘비천한’이라는 뜻이고 kha가 ‘비어 있는’이라는 뜻이어서, 첫째 진리가 여러 위험의 터전이므로 경멸할 만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영원함·아름다움·행복·자아가 비어 있으므로 비어 있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 어원 풀이는 언어학적이라기보다 교학적인 것이지만, 붓다가 이 말로 가리키려 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 dukkha란 고통이라기보다 ‘결함이 있음’, ‘만족스럽지 못함’, ‘의지할 만하지 않음’에 가까운 말이다. 이 강좌에서는 관례를 따라 ‘괴로움’으로 옮기되, 이 말이 나올 때마다 그 넓은 뜻을 함께 떠올려야 한다.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는 말은 ‘태어나는 순간이 아프다’는 뜻이 아니라, 태어남으로 시작되는 삶 전체가 결국 의지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뜻이다.

여덟 가지 괴로움

정형구가 드는 괴로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으로 이를 여덟 가지로 헤아리며, 「대념처경」(DN 22)은 여기에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을 더한 정형구를 싣고 각각을 자세히 정의한다.1

표 2-1여덟 가지 괴로움
괴로움원어「대념처경」의 정의 요지
태어남jāti중생이 어떤 무리에서든 태어나고 생겨나고 무더기가 나타나며 감각장소를 얻는 것.
늙음jarā이가 빠지고 머리가 세고 주름이 지며, 수명이 줄고 감각기능이 쇠퇴하는 것.
병byādhi몸의 온갖 질병. 「대념처경」의 정형구에는 없고 「초전법륜경」에 나온다.
죽음maraṇa중생이 죽고 무더기가 무너지며 생명기능이 끊어지는 것.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ehi sampayogo원하지 않는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 그리고 자신의 손해를 바라는 이들과 만나고 함께하는 것.
좋아하는 것과 헤어짐piyehi vippayogo원하는 대상,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부모·형제·친구 등과 헤어지는 것.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yampicchaṃ na labhati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인 중생에게 ‘우리가 태어나지 않기를, 늙지 않기를’ 하는 바람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바란다고 얻을 수 없는 것.
취착의 대상인 다섯 무더기pañcupādānakkhandhā물질·느낌·인식·형성·의식의 다섯 무더기. 앞의 모든 괴로움을 요약한 것.

여기서 마지막 항목이 나머지 일곱을 요약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태어남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까지는 누구나 삶에서 겪는 구체적 사건들이다. 그런데 붓다는 이 모든 괴로움을 “요컨대 취착의 대상인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라는 한마디로 거두어들인다. 다섯 무더기(오온)란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을 이루는 물질·느낌·인식·형성·의식의 다섯 요소이다.

그림 2-5일곱 가지 괴로움을 다섯 무더기로 거두어들임

태어남늙음병죽음싫은 것과 만남좋은 것과 헤어짐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
요컨대, 취착의 대상인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saṃ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생겨남태어남이 괴로움인 것은 다섯 무더기가 생겨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너짐늙음과 병과 죽음이 괴로움인 것은 다섯 무더기가 쇠하고 무너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뜻대로 안 됨만남과 헤어짐과 얻지 못함이 괴로움인 것은 다섯 무더기가 우리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별적인 괴로움들은 모두 다섯 무더기라는 조건 지어진 존재 자체의 성격에서 나온다. 그래서 첫째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다섯 무더기를 이해해야 하며, 다음 편이 그 일을 맡는다. 여기서는 ‘취착의 대상인’(upādāna)이라는 수식어에만 주목해 두자. 정형구는 그냥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라고 하지 않고 ‘취착의 대상인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라고 한다. 괴로움은 다섯 무더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보다, 그것을 ‘나’와 ‘나의 것’으로 붙들고 있다는 데서 온다. 이 수식어가 둘째 진리로 가는 다리다.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

괴로움이 왜 이렇게 넓은 뜻으로 쓰이는지는 붓다가 설한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dukkhatā)을 보면 분명해진다.

Tisso imā, bhikkhave, dukkhatā. Katamā tisso? Dukkhadukkhatā, saṅkhāradukkhatā, vipariṇāmadukkhatā – imā kho, bhikkhave, tisso dukkhatā.

비구들이여,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괴로움인 괴로움의 성질, 형성된 것인 괴로움의 성질, 변화하는 괴로움의 성질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다.

「괴로움의 성질 경」, SN 45.165

『청정도론』 제16장은 이 셋을 느낌과 연결하여 풀이한다. 경에서는 형성된 것인 괴로움이 둘째로 나오지만, 이해하기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도록 여기서는 순서를 바꾸어 살펴본다.

괴로움인 괴로움dukkhadukkhatā

육체적·정신적 고통스러운 느낌. 그 자체로 괴롭기 때문에 괴로움이라 불린다. 병의 아픔, 상실의 슬픔처럼 누구나 괴로움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괴로움vipariṇāmadukkhatā

즐거운 느낌이 괴로움인 까닭.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변할 때 괴로움을 낳는다. 즐거움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변하기 마련이므로 의지할 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형성된 것인 괴로움saṅkhāradukkhat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온한 느낌을 포함하여, 조건에 따라 형성된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끊임없이 내몰리기 때문에 지닌 괴로움. 가장 깊고 미묘한 뜻이다.

변화하는 괴로움의 예는 가까이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기쁨은 헤어질 때 슬픔의 원인이 되고, 건강의 즐거움은 병들 때 고통의 원인이 된다. 기쁨이 클수록 그것을 잃을 때의 아픔도 크다. 형성된 것인 괴로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것이 첫째 진리가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라고 할 때의 괴로움이다.

이 세 번째 뜻은 처음 접하는 이에게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 아무런 고통도 없이 편안히 앉아 있는데 무엇이 괴로움이란 말인가? 붓다가 가리키는 것은 그 편안함이 조건 위에 얹혀 있어 조건이 바뀌면 곧 사라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흐름 자체가 결코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흐르는 강물 위에 지은 집은 아무리 아늑해 보여도 머물 곳이 되지 못한다. 이 뜻은 넷째 편에서 무상과 괴로움의 관계를 다룰 때 다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지금은 첫째 진리가 ‘삶에는 고통이 있다’는 누구나 아는 사실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건 지어진 존재 전체의 성격을 진단하고 있다는 점만 새겨 두자.

그림 2-6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 가려 보기

아래의 경험들은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 가운데 어느 것에 가장 곧바로 해당할까? 하나씩 골라 보자. 고르면 곧바로 풀이가 나타난다.

  1. 넘어져 무릎이 까져 욱신거리는 아픔

  2. 오랜만에 만난 벗과 웃으며 보내는 저녁의 즐거움

  3.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뒤 밀려오는 슬픔

  4. 아무 걱정도 기쁨도 없이 담담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평온한 한때

  5. 오래 바라던 시험에 합격한 날의 벅찬 기쁨

  6. 몸과 마음, 곧 조건 따라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다섯 무더기 전체

엄밀히 말하면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도 조건 지어진 것이므로 셋째 성질을 함께 지닌다. 여기서는 각 경험에 ‘가장 곧바로’ 해당하는 것을 골랐다.

  1. 「대념처경」의 정형구에는 ‘병’이 들어 있지 않은 대신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더해져 있다. 여덟 가지로 헤아리는 전통적인 방식은 「초전법륜경」의 정형구를 따른 것이다.

일어남의 진리

둘째 진리는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dukkhasamudaya ariyasacca), 곧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진리다. 한역으로는 집성제(集聖諦)라고 한다. samudaya는 ‘함께’(saṃ)와 ‘위로’(ud)와 ‘감’(aya)이 어우러진 말로, 무언가가 일어나 모여드는 것, 곧 발생과 그 원천을 뜻한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 yāyaṃ taṇhā ponob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 –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을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이니, 곧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이다.

「초전법륜경」, SN 56.11

갈애란 무엇인가

‘갈애’(渴愛)로 옮긴 taṇhā는 본래 ‘목마름’을 뜻하는 말이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목말라하는 마음, 그것이 갈애다. 목마름의 특징은 채워도 곧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한 모금의 물은 잠시 갈증을 달래지만 갈증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만족이 오래가지 않고 곧 다음 것을 원하게 되는 경험은, 이 말이 얼마나 정확한 비유인지를 보여 준다.

정형구는 갈애에 세 가지 수식어를 붙인다. 이 세 수식어는 갈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세 방향에서 그려 보인다.

다시 태어남을 가져온다ponobbhavikā

이 생에서 괴로움을 만들 뿐 아니라 다음 생을 일으키는 힘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윤회를 다루는 여덟째 편에서 살펴본다.

즐김과 탐욕을 함께한다nandirāgasahagatā

대상을 좋아하고 붙드는 마음과 언제나 함께 일어난다. 갈애는 홀로 오지 않고 늘 즐김과 탐욕을 데리고 온다.

여기저기서 즐긴다tatratatrābhinandinī

어느 하나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대상 저 대상, 이 존재 저 존재에서 즐길 거리를 찾아 옮겨 다닌다. 주석서는 갈애가 태어나는 곳마다 그곳에서 즐거워한다는 뜻으로도 풀이한다.

세 가지 갈애

붓다는 이 갈애를 세 가지로 나눈다. 세 갈애는 향하는 대상이 서로 다르고, 뒤의 두 갈애는 각각 특정한 견해를 동반한다.

표 2-2세 가지 갈애
갈애원어향하는 것함께하는 견해와 예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kāmataṇhā형색·소리·냄새·맛·감촉의 다섯 감각 대상우리가 흔히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 좋은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싶어 하는 마음.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계속 존재함영원한 자아가 있다는 상견(常見)을 동반한다. 죽은 뒤에도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 어떤 세계에 다시 태어나 영원히 머물고 싶어 하는 마음.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vibhavataṇhā존재가 끊어짐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단견(斷見)을 동반한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고 그것을 바라는 마음, 지금의 존재를 없애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

존재에 대한 갈애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각각 상견과 단견을 동반한다는 풀이는 『청정도론』을 따른 것이다.

첫째 갈애는 누구나 쉽게 알아본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갈애는 욕망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더 어렵다. 영원히 존재하고 싶다는 바람은 흔히 고귀한 소망으로 여겨지고,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오히려 욕망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붓다는 두 마음을 모두 갈애라고 부른다. 방향이 정반대일 뿐, 둘 다 ‘나’의 존재를 두고 무언가를 목말라한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제1절에서 본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과 닮았다. 상견과 단견은 존재를 둘러싼 두 극단이며, 붓다의 가르침은 여기서도 그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다.

특히 셋째 갈애가 있기 때문에 사성제는 ‘죽으면 모든 괴로움이 끝난다’는 생각을 해탈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 역시 갈애의 한 모습이며, 열반은 존재를 없애려는 갈애가 아니라 갈애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 점은 다음 절에서 열반이 무엇이 아닌지를 살필 때 다시 중요하게 등장한다.

왜 갈애인가

붓다는 왜 괴로움의 원인으로 하필 갈애를 들었을까? 뒤에 12연기를 공부하면 알게 되겠지만, 경전은 괴로움의 근본 원인으로 무명(無明, avijjā), 곧 사성제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도 든다. 『청정도론』은 둘째 진리에서 갈애만을 든 까닭을, 갈애가 괴로움의 가장 뚜렷하고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명은 갈애의 뿌리이지만, 다섯 무더기라는 괴로움을 직접 일으켜 다음 생으로 이어 주는 것은 갈애다.

어둠과 손

무명이 어둠이라면 갈애는 그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붙드는 행위다. 어둠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를 움켜쥐는 손의 움직임은 스스로 느낄 수 있다. 붓다는 사람들이 가장 알아차리기 쉬운 지점, 곧 ‘붙드는 행위’를 원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리고 손을 놓는 법을 익혀 가는 동안, 그 손을 뻗게 하던 어둠도 조금씩 걷힌다.

이 진리는 일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괴로움의 원인을 대개 바깥에서 찾는다. 원하는 것이 없어서, 싫은 사람이 있어서, 상황이 나빠서 괴롭다고 여긴다. 그러나 붓다는 원인을 안에서 찾는다.

바깥에서 찾는 원인

원하는 것이 없어서 괴롭다.

싫은 사람이 있어서 괴롭다.

상황이 나빠서 괴롭다.

→ 바깥의 조건을 모두 뜻대로 바꿀 수는 없다.

붓다가 가리키는 원인

원하는 것이 없는데도 그것을 원하는 목마름이 괴로움이다.

싫은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목마름이 괴로움이다.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라며 붙드는 마음이 괴로움이다.

→ 안의 목마름은 다룰 수 있다.

바깥의 조건을 모두 뜻대로 바꿀 수는 없지만, 안의 목마름은 다룰 수 있다. 여기에 이 진리가 주는 희망이 있다. 괴로움의 원인이 오로지 바깥에 있다면 우리는 세상이 바뀌기만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원인이 안에 있기에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담마빠다』는 이렇게 노래한다.

Taṇhāya jāyatī soko, taṇhāya jāyatī bhayaṃ;
taṇhāya vippamuttassa, natthi soko kuto bhayaṃ.

갈애에서 근심이 생기고, 갈애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갈애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근심이 없거늘 두려움이 어디서 오겠는가.

『담마빠다』 Dhp 216

소멸의 진리

셋째 진리는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dukkhanirodha ariyasacca), 한역으로 멸성제(滅聖諦)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 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그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이며, 버림이며, 놓아 버림이며, 벗어남이며, 집착 없음이다.

「초전법륜경」, SN 56.11

눈여겨볼 점은 이 정형구가 ‘괴로움의 소멸’을 정의하면서 괴로움이 아니라 갈애의 소멸을 말한다는 것이다.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지므로,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이 곧 괴로움의 소멸이다. 정형구는 같은 일을 다섯 가지 말로 거듭 표현한다. 한 가지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비추어 보이려는 것이다.

asesavirāganirodha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물든 빛이 바래듯 탐욕이 남김없이 사라짐
cāga버림붙들고 있던 것을 내버림
paṭinissagga놓아 버림되돌려 놓아 다시 붙들지 않음
mutti벗어남묶여 있던 데서 풀려남
anālaya집착 없음기대어 머물 거처를 더는 찾지 않음

그리고 이 소멸을 붓다는 열반(涅槃, nibbāna)이라고 불렀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nibbāna라는 말은 본래 불이 ‘꺼짐’을 뜻한다. 연료가 다하여 불이 저절로 꺼지듯,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불이 꺼진 것이 열반이다. 『청정도론』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기도 한다.

ni벗어남
~에서 떠나 있음
vāna얽어매는 것
곧 갈애
nibbāna갈애라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
(『청정도론』의 풀이)

갈애라는 실이 이 존재와 저 존재를 꿰매어 잇는데, 열반은 그 실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뜻이다. 앞 절에서 본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갈애가 바로 그 실이다. 경전은 열반을 여러 방식으로 표현한다. 사리뿟따 존자는 열반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Yo kho, āvuso,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 idaṃ vuccati nibbānaṃ.

벗이여, 탐욕의 소진, 성냄의 소진, 어리석음의 소진, 이것을 열반이라 한다.

「열반에 관한 질문 경」, SN 38.1

그러나 열반은 단순히 번뇌가 없어진 상태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붓다는 열반을 조건 지어진 모든 것과 성격이 전혀 다른,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무위법, asaṅkhata)으로 설한다.

Atthi, bhikkhave, ajātaṃ abhūtaṃ akataṃ asaṅkhataṃ. No cetaṃ, bhikkhave, abhavissa ajātaṃ abhūtaṃ akataṃ asaṅkhataṃ, nayidha jātassa bhūtassa katassa saṅkhatassa nissaraṇaṃ paññāyetha.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은 것, 생겨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다. 비구들이여, 만일 태어나지 않은 것, 생겨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면, 태어난 것, 생겨난 것, 만들어진 것, 형성된 것으로부터의 벗어남이 여기에서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우다나』, Ud 8.3

테라와다 전통은 이 가르침에 따라 열반을 실재하는 궁극적 실재(paramattha)로 여긴다. 다만 열반은 다섯 무더기처럼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어남도 사라짐도 없는 것이다. 붓다는 다른 경에서 조건 지어진 것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을 각각 세 가지 특징으로 대비한다.

그림 2-7조건 지어진 것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

조건 지어진 것saṅkhata

일어남이 알려진다.

사라짐이 알려진다.

머무는 동안 변함이 알려진다.

→ 다섯 무더기, 곧 첫째 진리의 괴로움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asaṅkhata

일어남이 알려지지 않는다.

사라짐이 알려지지 않는다.

머무는 동안 변함이 알려지지 않는다.

→ 열반, 곧 셋째 진리의 소멸

「형성된 것의 특징 경」(AN 3.47)을 바탕으로 정리함.

첫째 진리의 괴로움이 조건 지어진 것 전체의 성격이라면, 셋째 진리의 열반은 조건 지어진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그렇기에 열반은 ‘위없는 행복’(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 Dhp 203)이라 불린다. 여기서 행복이란 즐거운 느낌이 아니라, 변하기 마련인 느낌들에 더 이상 내몰리지 않는 안온함을 가리킨다. 제3절에서 즐거운 느낌조차 변하기 마련이어서 괴로움이라 했던 것을 떠올리면, 열반의 행복이 어떤 즐거운 느낌일 수 없는 까닭이 분명해진다.

열반은 무엇이 아닌가

열반은 아직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이의 언어로는 온전히 그려 낼 수 없으므로, 경전은 열반이 무엇이 아닌지를 밝히는 방식으로도 자주 설한다. 처음 배우는 이가 빠지기 쉬운 오해를 세 가지만 짚어 두자.

오해 하나열반은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나 세계다.

열반은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나 세계가 아니다. 붓다와 아라한들은 살아 있는 동안 열반을 실현했다. 붓다는 서른다섯에 열반을 실현하고 마흔다섯 해를 더 살았다. 경전은 이 차이를 두 가지 열반의 요소로 구별한다.1

표 2-3두 가지 열반의 요소
이름원어뜻
남음이 있는 열반
유여열반(有餘涅槃)
saupādisesā nibbānadhātu살아 있는 동안 번뇌가 완전히 소멸한 것. 아라한은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했지만, 몸과 마음의 다섯 무더기는 아직 남아 있어 즐겁고 괴로운 느낌을 겪는다.
남음이 없는 열반
무여열반(無餘涅槃)
anupādisesā nibbānadhātu그 성자의 몸이 무너진 뒤 다섯 무더기마저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

어느 쪽이든 열반은 어딘가로 가는 일이 아니다. 남음이 있는 열반은 지금 여기의 삶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고, 남음이 없는 열반은 더 이상 어디에도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오해 둘열반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 곧 허무나 절멸이다.

열반은 허무나 절멸이 아니다. 「악기왓차곳따 경」(MN 72)에서 유행승 왓차곳따가 해탈한 이는 죽은 뒤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묻자, 붓다는 불의 비유로 답한다.

그림 2-8꺼진 불은 어느 쪽으로 갔는가 (MN 72)

연료를 인연하여 타는 불 연료가 다함 북쪽으로? 동쪽으로? 서쪽으로?남쪽으로? 꺼진 불: “어느 쪽으로 갔다”는말이 들어맞지 않는다

붓다는 먼저 묻는다. 네 앞에서 불이 타고 있다면 그것이 타고 있는 줄 알겠느냐고. 왓차곳따는 안다고 답한다. 무엇을 인연하여 타느냐고 물으면 풀과 장작이라는 연료를 인연하여 탄다고 답할 것이다. 그 불이 꺼지면 꺼진 줄 알겠느냐는 물음에도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자 붓다는 묻는다. 그렇다면 그 꺼진 불은 여기서 동쪽으로 갔는가, 서쪽으로 갔는가, 북쪽으로 갔는가, 남쪽으로 갔는가? 왓차곳따는 그런 말은 들어맞지 않는다고 답한다. 연료를 인연하여 타던 불이 연료가 다하여 꺼졌을 뿐, 어디로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꺼진 불이 어디로 갔다고 말할 수 없듯이, 해탈한 이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범주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 물음은 답이 ‘없음’이어서가 아니라, 물음의 틀 자체가 맞지 않아서 답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붓다는 열반을 일부러 ‘있다’(atthi)는 말로 설했다. 열반이 단순한 없음이라면 붓다가 그것을 ‘조건 지어진 것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 부를 까닭이 없다. 앞 절에서 본 것처럼, 존재가 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열반이 아니라 셋째 갈애일 뿐이다.

오해 셋열반은 특별한 명상 체험이나 황홀한 마음 상태다.

열반은 특별한 명상 체험이나 황홀한 마음 상태가 아니다. 붓다가 출가한 뒤 두 스승 밑에서 이른 깊은 선정의 경지조차 열반이 아니었음을 첫째 편에서 보았다. 붓다는 그 경지가 아무리 고요해도 괴로움의 끝이 아님을 알고 스승들 곁을 떠났다. 아무리 고요하고 미묘한 마음 상태라도 조건에 따라 일어난 것은 다시 사라지며, 사라지는 것은 열반이 아니다. 열반은 괴로움의 완전한 끝, 붓다가 “위없는,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MN 26)이라 부른 바로 그것이다.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성자의 단계에 대해서는 이 강좌의 마지막 편인 ‘해탈’에서 다시 자세히 다룬다. 지금은 셋째 진리가 말하는 소멸이 어딘가로 가는 일도, 모든 것이 없어지는 일도, 특별한 체험도 아니라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새겨 두자.

  1. 「열반의 요소 경」(Iti 44)의 구별을 따랐다. 한역 불교에서는 이를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 불러 왔다.

도의 진리

넷째 진리는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 한역으로 도성제(道聖諦)다. 그 내용은 제1절에서 본 중도, 곧 여덟 요소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팔정도, ariya aṭṭhaṅgika magga)이다. 원어의 paṭipadā는 발을 디디며 나아가는 길, 곧 실제로 밟아 가는 실천의 길을 뜻한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여덟 요소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이니, 곧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초전법륜경」, SN 56.11

「분석 경」(SN 45.8)은 여덟 요소 각각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 그 정의에 따라 여덟 요소를 정리하고, 「짧은 문답 경」(MN 44)에서 담마딘나 비구니가 설한 대로 계·삼매·지혜의 세 무더기로 묶어 보자. 먼저 아래의 바퀴에서 요소를 하나씩 눌러 보면 그 요소의 정의가 나타나고 표의 해당 줄이 밝아진다. 팔정도를 흔히 여덟 바퀴살의 법륜으로 그리는 것은, 바퀴살 하나만 빠져도 바퀴가 굴러가지 못하듯 여덟 요소가 함께 갖추어져야 길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림 2-9여덟 바퀴살의 길

12345678팔정도magga지혜계삼매
지혜
계
삼매
요소를 하나 골라 보자.
표 2-4여덟 요소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
묶음요소「분석 경」의 정의
지혜
paññā
바른 견해
sammādiṭṭhi
괴로움에 대한 앎,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앎,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앎,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앎. 곧 사성제를 아는 것.
바른 사유
sammāsaṅkappa
감각적 욕망을 떠난 사유, 악의 없는 사유, 해치지 않는 사유.
계
sīla
바른 말
sammāvācā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을 삼가는 것.
바른 행위
sammākammanta
생명을 죽이는 것,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 삿된 성행위를 삼가는 것.
바른 생계
sammā-ājīva
그릇된 생계를 버리고 바른 생계로 살아가는 것.
삼매
samādhi
바른 노력
sammāvāyāma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은 버리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은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은 늘리려고 노력하는 것.
바른 마음챙김
sammāsati
몸·느낌·마음·법에 대해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며, 마음챙기며 머무는 것(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
바른 삼매
sammāsamādhi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을 떠나 첫 번째 선정부터 네 번째 선정까지 갖추어 머무는 것.

계단이 아니라 함께 자라는 요소

이 표는 두 가지를 보여 준다. 첫째, 팔정도는 여덟 개의 계단이 아니라 함께 닦아야 할 여덟 가지 요소다. 바른 견해를 완성한 뒤에 바른 사유로 넘어가고, 바른 사유를 완성한 뒤에 바른 말로 넘어가는 식이 아니라, 여덟 요소가 서로를 도우며 함께 자라난다. 바른 말을 지키려는 노력은 바른 노력이고, 말하기 전에 자기 마음을 살피는 것은 바른 마음챙김이며, 거짓말이 왜 해로운지 아는 것은 바른 견해다. 주석서에 따르면 성자의 도(道)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여덟 요소가 한 마음 안에서 동시에 갖추어진다.

둘째, 그럼에도 순서에는 뜻이 있다. 붓다는 「위대한 마흔 가지 경」(MN 117)에서 “바른 견해가 앞장선다”(sammādiṭṭhi pubbaṅgamā hoti)고 설한다. 무엇이 괴로움이고 무엇이 그 원인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나머지 일곱 요소는 방향을 잃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깊이 집중해도 방향이 틀렸다면 그 노력과 집중은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그런데 표에 나타난 대로 바른 견해의 내용은 다름 아닌 사성제다. 곧 사성제를 아는 것이 팔정도의 첫 요소이고, 팔정도는 사성제의 넷째 진리다. 네 가지 진리와 여덟 가지 길은 이렇게 서로를 안고 있다.

그림 2-10서로를 안고 있는 사성제와 팔정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 일어남 소멸 넷째 진리 = 팔정도 사유·말·행위·생계 노력·마음챙김·삼매 바른 견해 첫째 요소 그 내용은 사성제를 아는 것

사성제는 팔정도를 넷째 진리로 품고, 팔정도는 사성제를 아는 것을 첫째 요소로 품는다. 길을 걷는 일과 진리를 아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떠나지 않는다.

세 가지 공부와 팔정도

「짧은 문답 경」에서 담마딘나 비구니는 팔정도가 세 무더기에 포함되는 것이지 세 무더기가 팔정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첫째 편에서 본 계·삼매·지혜의 세 공부는 팔정도보다 넓은 틀이며, 팔정도는 그 틀 안에서 해탈로 직접 이끄는 여덟 요소를 추린 것이다. 표에서 보듯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는 지혜에, 바른 말·행위·생계는 계에, 바른 노력·마음챙김·삼매는 삼매에 속한다.

팔정도의 배열지혜계삼매
닦아 가는 순서계삼매지혜

순서가 지혜·계·삼매인 것은 팔정도의 배열을 따른 것이다. 먼저 바른 견해로 방향을 세워야 길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닦아 가는 순서는 첫째 편에서 본 것처럼 계에서 삼매로, 삼매에서 지혜로 나아간다. 계로 행동이 가지런해지면 마음이 쉽게 고요해지고, 고요해진 마음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생긴 지혜가 다시 처음의 바른 견해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이 강좌의 제4부는 이 순서를 따라 보시와 계와 수행을 다룬다.

세 번 굴린 열두 가지 모습과 네 가지 역할

「초전법륜경」에서 네 가지 진리를 설한 붓다는 곧이어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밝힌다. 이 부분은 흔히 사성제의 내용만큼 주목받지 못하지만, 사성제를 ‘아는’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여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첫째 진리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Idaṃ dukkhaṃ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Taṃ kho panidaṃ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eyy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 ‘Taṃ kho panidaṃ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ā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 본 적 없는 법들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겼고, 앎이 생겼고, 지혜가 생겼고, 명지가 생겼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철저히 알아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 본 적 없는 법들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겼고 … 비구들이여,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철저히 알았다’라고, 예전에 들어 본 적 없는 법들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겼고, 앎이 생겼고, 지혜가 생겼고, 명지가 생겼고, 광명이 생겼다.

「초전법륜경」, SN 56.11

‘예전에 들어 본 적 없는 법들에 대하여’라는 말에 주목하자. 붓다는 이 앎을 누구에게서 배우거나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꿰뚫어 알았다. 그리고 그 앎을 눈·앎·지혜·명지·광명이라는 다섯 가지 말로 거듭 표현한다. 어둠 속에 있던 것이 환히 드러나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구조가 나머지 세 진리에도 되풀이된다. 각 진리마다 세 단계의 앎이 있고, 네 진리에 세 단계씩이니 모두 열두 가지가 된다. 붓다는 이를 ‘세 번 굴린 열두 가지 모습’(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이라 부른다. 주석서는 세 단계를 다음과 같이 이름 붙인다.1

진리에 대한 앎saccañāṇa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진리 자체를 아는 것. 무엇이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아는 단계다.

역할에 대한 앎kiccañāṇa

그 진리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 앎이 실천의 과제로 바뀌는 단계다.

이루었음에 대한 앎katañāṇa

그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었다고 아는 것. 과제가 완수되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단계다.

아래의 표에서 네 진리와 세 단계가 만나는 열두 칸을 하나씩 눌러 보자. 각 칸에 해당하는 경의 원문과 우리말이 나타난다. 가로로 읽으면 한 진리를 세 번 굴리는 과정이 되고, 세로로 읽으면 같은 단계의 앎이 네 진리에 걸쳐 되풀이되는 모습이 된다.

그림 2-11세 번 굴린 열두 가지 모습

진리에 대한 앎sacca
역할에 대한 앎kicca
이루었음에 대한 앎kata
괴로움
일어남
소멸
길

칸을 하나 골라 보자.

네 가지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

여기서 둘째 단계, 곧 각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이 중요하다. 네 가지 진리는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이지만, 아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네 진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표 2-5네 가지 진리와 그 역할
진리역할뜻
괴로움철저히 알아야 한다
pariññeyya
괴로움을 없애려 하거나 피하려 하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완전히 아는 것.
괴로움의 일어남버려야 한다
pahātabba
갈애를 남김없이 끊어 내는 것.
괴로움의 소멸실현해야 한다
sacchikātabba
열반을 직접 체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소멸로 이끄는 길닦아야 한다
bhāvetabba
팔정도를 계발하여 성숙시키는 것.

이 네 역할은 사성제가 지식이 아니라 실천의 체계임을 분명히 한다. 특히 첫째 역할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다. 괴로움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먼저 ‘철저히 아는’ 것이다. 우리는 괴로우면 대개 그것을 곧바로 없애려 하거나 피하려 한다. 그러나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괴로움 자체가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를 붙들고, 그것으로 괴로움을 없애려 하는 헛수고를 되풀이한다. 허전함을 새로운 즐거움으로 채우려 하고, 불안을 더 많이 가지는 것으로 달래려 하는 것이 그런 예다. 목마름을 소금물로 달래려는 것과 같다.

갈애에 대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버리는’ 것이다. 열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실현’의 대상이며, 팔정도는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닦음’의 대상이다. 네 역할을 뒤섞으면 공부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갈애를 철저히 알기만 하고 버리지 않는다면 지식만 늘고, 열반을 이해하려고만 한다면 관념만 쌓이며, 팔정도에 감탄만 하고 닦지 않는다면 길은 지도 위에만 남는다.

한순간에 함께 이루어지는 네 가지 일

『청정도론』은 이 네 역할이 성자의 도가 일어나는 한순간에 함께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괴로움을 꿰뚫어 아는 그 순간이 갈애를 끊는 순간이며, 열반을 실현하는 순간이며, 길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가왐빠띠 경」(SN 56.30)에서 괴로움을 보는 이는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고 설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네 진리는 따로따로 떨어진 네 개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의 통찰이 네 방향으로 비추는 빛이다.

깨달음의 선언

「초전법륜경」에서 붓다는 이 열두 가지 앎이 완전히 청정해지기 전에는 자신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선언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suvisuddhaṃ ahosi, ath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ṃ.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이와 같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의 지견이 나에게 완전히 청정해졌을 때, 비구들이여, 그때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계에서, 사문과 브라만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중생 가운데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선언하였다.

「초전법륜경」, SN 56.11

이 고백은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붓다 자신의 정의라 할 만하다. 붓다의 깨달음은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우주의 비밀에 대한 앎이 아니라, 네 가지 진리를 세 번 굴려 열두 가지 모습으로 완전히 청정하게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붓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누각의 비유 (SN 56.44)

누각의 아래층을 짓지 않고 위층을 지을 수 없듯이, 네 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서 괴로움을 바르게 끝내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아래층을 지은 뒤에 위층을 올리는 것이 당연하듯, 네 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 이가 괴로움을 바르게 끝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붓다를 따라 해탈에 이르는 모든 이가 걷는 길은 결국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길이다. 앞으로 이 강좌에서 배울 모든 것은 이 누각의 아래층을 한 칸씩 쌓아 올리는 일이다.

  1. 세 단계의 이름은 「초전법륜경」에 대한 주석서(『사랏타빠까시니』)의 풀이를 따른 것이다.

불교는 비관주의인가

사성제가 괴로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불교는 종종 삶을 어둡게 보는 비관주의로 여겨진다. “삶은 괴로움”이라는 말만 떼어 듣고 나면 그렇게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사성제를 첫째 진리에서 멈춰 읽은 데서 온 오해다. 세 가지 점을 짚어 두자.

즐거움을 부정하지 않는다

첫째, 붓다는 삶에 즐거움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마할리 경」(SN 22.60)에서 붓다는, 만일 물질·느낌·인식·형성·의식이 오로지 괴로움뿐이고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면 중생들이 그것에 애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한다. 누구도 오로지 쓰기만 한 음식에 손을 뻗지 않는다. 우리가 다섯 무더기에 매달리는 것은 거기에 분명히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다섯 무더기를 세 가지 면에서 있는 그대로 보라고 가르친다.

그림 2-12다섯 무더기를 보는 세 가지 면

달콤함assāda

다섯 무더기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그래서 중생이 애착한다.

위험ādīnava

그 즐거움은 무상하고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염오할 수 있다.

벗어남nissaraṇa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릴 수 있다. 그래서 해탈할 수 있다.

다섯 무더기에는 달콤함(assāda)이 있기에 중생이 애착하고, 위험(ādīnava)이 있기에 염오할 수 있으며, 벗어남(nissaraṇa)이 있기에 해탈할 수 있다. 붓다는 즐거움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즐거움이 변하기 마련이어서 궁극의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 그 즐거움에 매달릴 때 괴로움이 따라온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달콤함만 보는 것이 낙관이고 위험만 보는 것이 비관이라면,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함께 보는 것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비관도 낙관도 아니다.

첫째 진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둘째, 사성제는 첫째 진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제2절의 의사의 비유를 떠올려 보자. 의사가 병을 진단하는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다. 병명을 정확히 말해 주는 의사를 비관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병이 없다고 둘러대는 의사가 환자를 해친다. 사성제의 셋째 진리는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가 실제로 있다는 선언이며, 넷째 진리는 그 상태에 이르는 길이 실제로 있고 누구나 걸을 수 있다는 선언이다. 이보다 더 큰 희망을 말하는 가르침을 찾기는 어렵다.

실제로 「초전법륜경」은 첫 설법이 끝났을 때 땅의 신들부터 범천의 신들에 이르기까지 온 세계에 법의 바퀴가 굴려졌다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고 전한다.

Etaṃ bhagavatā bārāṇasiyaṃ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ṃ dhammacakkaṃ pavattitaṃ appaṭivattiyaṃ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세존께서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 사슴 동산에서 이 위없는 법의 바퀴를 굴리셨으니, 사문이나 브라만이나 신이나 마라나 범천이나 세상의 그 누구도 이를 되돌릴 수 없다.

「초전법륜경」, SN 56.11

경은 이 외침이 한 하늘에서 다음 하늘로 이어져 범천의 세계에까지 이르렀고, 일만 세계가 흔들리며 신들의 광채를 넘어서는 한량없는 빛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이 경의 마지막 정조는 어둠이 아니라 환희다. 괴로움을 말하는 가르침이 이렇게 환희로 끝난다는 것 자체가, 사성제가 무엇을 향하는 가르침인지를 보여 준다.

실천하는 이의 삶은 밝아진다

셋째, 사성제를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의 삶은 어두워지지 않는다.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기 시작한 사람은 오히려 얻지 못하는 것에 덜 매달리고, 잃는 것에 덜 무너지며, 남을 덜 원망한다. 괴로움의 원인이 바깥이 아니라 안의 목마름에 있음을 알기에 남 탓을 덜 하고, 즐거움이 변하기 마련임을 알기에 즐거운 순간을 더 가볍게 누린다. 첫째 편에서 본 「깔라마 경」의 끝에서 붓다가 말했듯, 갈애를 다스리기 시작한 사람은 다음 생을 믿든 믿지 않든 “지금 이 삶에서 원한 없이, 악의 없이,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아간다.

사성제는 삶을 어둡게 보는 눈이 아니라, 삶을 있는 그대로 보아 그 안에서 진정으로 의지할 만한 것을 찾아내는 눈이다. 병을 병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만이 병을 고칠 수 있듯, 괴로움을 괴로움이라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용어 정리

이 편에서 새로 만난 빠알리 용어들이다. 읽기는 이 강좌의 한글 표기 원칙을 따랐고, 용례는 이 편에 실린 원문에서 골랐다. 네 가지 진리와 네 가지 역할처럼 짝을 이루는 용어는 짝과 함께 외워 두면 오래 남는다.

표 2-6둘째 편의 용어 서른 개
번호원어읽기분류뜻용례
1ariyasacca아리야삿짜사성제성스러운 진리, 성제(聖諦)Cattārimāni, bhikkhave, ariyasaccāni.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2dukkha둑카사성제괴로움. 결함이 있고 만족스럽지 못하며 의지할 만하지 않음jātipi dukkhā태어남도 괴로움이다
3samudaya사무다야사성제일어남, 발생과 그 원천. 집(集)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4nirodha니로다사성제소멸. 멸(滅)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5paṭipadā빠띠빠다사성제길, 실제로 밟아 가는 실천의 길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
6majjhimā paṭipadā맛지마 빠띠빠다초전법륜중도(中道). 두 극단을 떠난 길, 곧 팔정도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여래가 완전히 깨달은 중도
7dhammacakka담마짝까초전법륜법의 바퀴, 법륜(法輪)anuttaraṃ dhammacakkaṃ pavattitaṃ위없는 법의 바퀴가 굴려졌다
8kāmasukhallikānuyoga까마수칼리까누요가극단감각적 쾌락에 탐닉함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다
9attakilamathānuyoga앗따낄라마타누요가극단자신을 괴롭히는 데 몰두함, 고행attakilamathānuyogo dukkho자신을 괴롭히는 데 몰두하는 것은 괴롭다
10upādāna우빠다나괴로움취착, 붙들어 쥠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취착의 대상인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다
11dukkhadukkhatā둑카둑카따괴로움괴로움인 괴로움. 고통스러운 느낌 자체Dukkhadukkhatā괴로움인 괴로움의 성질
12vipariṇāmadukkhatā위빠리나마둑카따괴로움변화하는 괴로움. 즐거운 느낌이 변하여 괴로움을 낳음vipariṇāmadukkhatā변화하는 괴로움의 성질
13saṅkhāradukkhatā상카라둑카따괴로움형성된 것인 괴로움. 조건 지어진 모든 것이 지닌 괴로움saṅkhāradukkhatā형성된 것인 괴로움의 성질
14taṇhā딴하일어남갈애(渴愛). 본뜻은 ‘목마름’Taṇhāya jāyatī soko갈애에서 근심이 생긴다
15kāmataṇhā까마딴하일어남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kāmataṇhā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16bhavataṇhā바와딴하일어남존재에 대한 갈애. 상견을 동반함bhavataṇhā존재에 대한 갈애
17vibhavataṇhā위바와딴하일어남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 단견을 동반함vibhavataṇhā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
18avijjā아윗자일어남무명(無明). 사성제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avijjā무명
19nibbāna닙바나소멸열반(涅槃). 불이 꺼짐, 갈애에서 벗어남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열반은 위없는 행복이다
20asaṅkhata아상카따소멸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 무위(無爲)ajātaṃ abhūtaṃ akataṃ asaṅkhataṃ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
21ariya aṭṭhaṅgika magga아리야 앗탕기까 막가길여덟 요소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 팔정도(八正道)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그것은 바로 여덟 요소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이다
22sammādiṭṭhi삼마딧티길바른 견해. 사성제를 아는 것sammādiṭṭhi pubbaṅgamā hoti바른 견해가 앞장선다
23pariññeyya빠린녜야역할철저히 알아야 할 것. 괴로움에 대한 역할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eyyaṃ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철저히 알아야 한다
24pahātabba빠하땁바역할버려야 할 것. 일어남에 대한 역할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pahātabbaṃ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버려야 한다
25sacchikātabba삿치까땁바역할실현해야 할 것. 소멸에 대한 역할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sacchikātabbaṃ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는 실현해야 한다
26bhāvetabba바웨땁바역할닦아야 할 것. 길에 대한 역할paṭipadā ariyasaccaṃ bhāvetabbaṃ길의 성스러운 진리는 닦아야 한다
27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띠빠리왓따 드와다사까라깨달음세 번 굴린 열두 가지 모습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세 번 굴린 열두 가지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의 지견
28assāda앗사다관찰달콤함, 즐거움을 주는 면assāda다섯 무더기의 달콤함
29ādīnava아디나와관찰위험, 허물ādīnava다섯 무더기의 위험
30nissaraṇa닛사라나관찰벗어남, 떠남saṅkhatassa nissaraṇaṃ형성된 것으로부터의 벗어남

이 편의 전거 약어

이 편에서 인용한 경전과 주석서의 약어다. ‘SN 56.11’은 『상윳따 니까야』 제56 상윳따의 열한 번째 경을, ‘Ud 8.3’은 『우다나』 제8품의 세 번째 경을, ‘Iti 44’는 『이띠웃따까』의 마흔네 번째 경을 가리킨다.

표 2-7전거 약어
약어원서명우리말 이름
DNDīghanikāya디가 니까야 (길게 설하신 경 모음)
MNMajjhimanikāya맛지마 니까야 (중간 길이로 설하신 경 모음)
SNSaṃyuttanikāya상윳따 니까야 (주제별로 묶은 경 모음)
ANAṅguttaranikāya앙굿따라 니까야 (숫자별로 묶은 경 모음)
DhpDhammapada담마빠다 (법구경)
UdUdāna우다나 (감흥어)
ItiItivuttaka이띠웃따까 (여시어)
VismVisuddhimagga청정도론

이해도 점검

이 편의 핵심을 다섯 문제로 확인해 보자. 보기를 누르면 곧바로 채점되고, 그 아래의 해설을 펼쳐 볼 수 있다. 마지막 문제는 여러 절의 내용을 함께 엮어야 풀 수 있는 심화 문제다. 푼 기록은 이 기기에 남으므로 나중에 돌아와도 이어서 볼 수 있다.

0 / 5 정답
아직 푼 문제가 없다
첫째 문제

「초전법륜경」에서 붓다가 말한 중도(majjhimā paṭipadā)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해설 펼치기

경은 두 극단을 모두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한다’고 평가한 뒤, 중도를 두 극단 사이의 한 지점으로 정의하지 않고 그것이 낳는 결과, 곧 눈과 앎을 만들고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끈다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곧바로 중도가 여덟 요소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이라고 밝힌다. 가는 중도를 처세의 절충으로 오해한 것이다. 쾌락과 고행은 몸을 즐겁게 하느냐 괴롭히느냐의 차이일 뿐 같은 축 위에 있으므로, 그 중간 역시 같은 축 위의 한 점일 뿐이다. 라는 틀렸다. 중도는 넷째 진리인 도의 진리이며, 소멸 자체가 아니라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둘째 문제

아무런 고통도 기쁨도 없이 담담하고 평온하게 앉아 있는 순간도 첫째 진리에서 말하는 괴로움에 해당한다고 할 때, 그 까닭을 가장 잘 설명하는 괴로움의 성질은?

해설 펼치기

『청정도론』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온한 느낌을 포함하여, 조건에 따라 형성된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끊임없이 내몰리기 때문에 지니는 괴로움을 ‘형성된 것인 괴로움’이라 부른다. 이것이 가장 깊고 미묘한 뜻의 괴로움이며, 첫째 진리가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라고 할 때의 괴로움이다. 가는 고통스러운 느낌, 나는 즐거운 느낌에 해당하는 설명이어서 평온한 느낌에는 맞지 않는다. 라는 괴로움을 좁은 뜻의 ‘고통’으로만 이해한 것이다. dukkha는 결함이 있고 의지할 만하지 않다는 넓은 뜻을 지닌다.

셋째 문제

세 가지 갈애 가운데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vibhavataṇh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해설 펼치기

『청정도론』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단견을 동반한다고 풀이한다. 존재가 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망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의 존재를 두고 목말라하는 갈애의 한 모습이다. 열반은 존재를 없애려는 갈애가 아니라 갈애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라처럼 이것을 해탈로 이끄는 마음으로 보는 것은 정반대의 오해다. 나는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 다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kāmataṇhā)의 설명이다.

넷째 문제

「초전법륜경」의 세 번 굴린 열두 가지 모습에서, 각 진리와 그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역할)을 짝지은 것 가운데 옳지 않은 것은?

해설 펼치기

괴로움의 소멸, 곧 열반에 대해 해야 할 일은 ‘실현해야 한다’(sacchikātabba)이다. 열반은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대상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대상이다. ‘철저히 알아야 한다’는 첫째 진리인 괴로움에 대한 역할이다. 괴로움에 대해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없애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완전히 아는 것이라는 점도 함께 새겨 두자. 『청정도론』은 이 네 역할이 성자의 도가 일어나는 한순간에 함께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다섯째 문제 (심화)

이 편의 내용에 비추어 다음 진술 가운데 옳은 것만을 모두 고른 것은?

  1. ㄱ. 첫째 진리의 정형구가 ‘다섯 무더기’가 아니라 ‘취착의 대상인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괴로움이 다섯 무더기를 ‘나’와 ‘나의 것’으로 붙드는 데서 온다는 점을 드러내며 둘째 진리로 이어진다.
  2. ㄴ. 붓다는 「마할리 경」에서 다섯 무더기가 오로지 괴로움뿐이라고 설했으므로, 즐거운 느낌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3. ㄷ. 열반은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소진이자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이며, 꺼진 불의 비유(MN 72)가 보여 주듯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범주가 들어맞지 않으므로 허무나 절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4. ㄹ. 팔정도는 바른 견해를 먼저 완성한 뒤에 바른 사유로, 바른 사유를 완성한 뒤에 바른 말로 차례차례 올라가는 여덟 개의 계단이다.

해설 펼치기

ㄱ은 옳다. ‘취착의 대상인’(upādāna)이라는 수식어는 괴로움이 다섯 무더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을 붙드는 데서 온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것이 갈애를 말하는 둘째 진리로 가는 다리가 된다. ㄷ도 옳다. 사리뿟따는 열반을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소진이라 했고(SN 38.1), 붓다는 열반을 ‘있다’는 말로 설하며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이라 했다(Ud 8.3). 꺼진 불이 어느 쪽으로 갔다고 말할 수 없듯 해탈한 이에게는 존재와 비존재의 범주가 들어맞지 않는다.

ㄴ은 틀렸다. 「마할리 경」은 정반대로, 다섯 무더기가 오로지 괴로움뿐이라면 중생이 그것에 애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한다. 다섯 무더기에는 달콤함이 있고, 붓다는 그 즐거움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변하기 마련이어서 의지할 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ㄹ도 틀렸다. 팔정도는 여덟 개의 계단이 아니라 함께 자라는 여덟 요소이며, 성자의 도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한 마음 안에서 동시에 갖추어진다. 바른 견해가 앞장선다는 것(MN 117)은 방향을 세운다는 뜻이지, 그것을 완성해야 다음 요소로 넘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정답은 ㄱ, 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