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법인’과 ‘삼특상’
우리나라 불교에서 이 가르침은 흔히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일체개고(一切皆苦)의 셋, 또는 여기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더한 넷을 ‘법의 도장’, 곧 어떤 가르침이 붓다의 가르침인지를 판별하는 표지로 삼는 것이다. 문서에 찍힌 도장으로 그 문서가 진짜인지를 가리듯, 이 셋 또는 넷에 맞는 가르침이면 붓다의 가르침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이름과 틀은 산스크리트어 문헌과 한역 불교에서 정립된 것으로, 빠알리 경전과 주석서에는 ‘법인’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테라와다 전통은 무상·괴로움·무아의 셋을 가르침을 판별하는 도장이 아니라 조건 지어진 현상들이 실제로 지닌 ‘특성’(lakkhaṇa)으로 다루며, 열반은 이 특성들과 나란히 놓이는 것이 아니라 이 특성들을 지닌 것들로부터의 벗어남으로 다룬다. 두 틀의 내용은 크게 어긋나지 않지만, 이 강좌는 빠알리 전통의 틀을 따라 ‘세 가지 특성’이라고 부르겠다.
| 동아시아 불교의 삼법인·사법인 | 테라와다의 세 가지 특성 |
|---|---|
| 제행무상(諸行無常) | 형성된 모든 것은 무상하다 (sabbe saṅkhārā aniccā) |
| 일체개고(一切皆苦) | 형성된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sabbe saṅkhārā dukkhā) |
| 제법무아(諸法無我) | 모든 법은 무아이다 (sabbe dhammā anattā) |
| 열반적정(涅槃寂靜) | 세 특성과 나란히 세지 않고, 조건 지어진 것으로부터의 벗어남으로 다룸 |
‘형성된 모든 것’과 ‘모든 법’
표에서 보듯 빠알리 정형구는 앞의 둘에 ‘형성된 모든 것’(sabbe saṅkhārā)을, 셋째에 ‘모든 법’(sabbe dhammā)을 주어로 쓴다.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형성된 것’(saṅkhāra)은 셋째 편에서 본 다섯 무더기의 넷째 무더기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형성된 모든 것, 곧 다섯 무더기 전체를 가리킨다. 같은 낱말이 문맥에 따라 넓게도 좁게도 쓰인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무상과 괴로움은 조건 지어진 것에만 해당한다. 그러나 ‘법’(dhamma)에는 조건 지어진 것뿐 아니라 조건 지어지지 않은 열반도 든다. 주석서는 셋째 정형구가 열반까지 포함하여 모든 법이 무아라고 설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열반은 무상하지도 괴로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열반이 ‘참된 나’인 것은 아니다.
그림 4-1세 정형구가 미치는 범위
무상과 괴로움은 안쪽 원에만, 무아는 바깥 틀 전체에 미친다. 그래서 ‘무아’는 열반을 포함한 모든 법에 대한 말이 된다.
붓다가 정한 규칙이 아니라 발견한 사실
세 가지 특성은 붓다가 정한 규칙이 아니라 붓다가 발견한 사실이다. 「출현 경」(AN 3.136)에서 붓다는 이렇게 설한다.
Uppādā vā, bhikkhave, tathāgatānaṃ anuppādā vā tathāgatānaṃ, ṭ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Sabbe saṅkhārā aniccā. Taṃ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ā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 ‘sabbe saṅkhārā aniccā’ti.
비구들이여, 여래들이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그 요소[무상]는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 이는 법의 확립성이요 법의 결정성이다. 형성된 모든 것은 무상하다. 여래는 이것을 완전히 깨닫고 꿰뚫어 안다. 완전히 깨닫고 꿰뚫어 안 뒤에 ‘형성된 모든 것은 무상하다’라고 알리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한다.
「출현 경」, AN 3.136
같은 말이 괴로움과 무아에 대해서도 되풀이된다. 둘째 편에서 사성제가 붓다의 출현과 무관하게 참인 ‘지도’라 했던 것처럼, 세 가지 특성도 붓다가 있든 없든 언제나 그러한 사실이다. 붓다가 한 일은 그 사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알리고 가르치고 드러내어 누구나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경이 일곱 개의 동사를 잇달아 쓰는 데서 이 사실을 세상에 밝혀 보이려는 붓다의 정성이 느껴진다.
무상
무상(anicca)은 ‘영원하지 않음’, ‘항상하지 않음’이라는 뜻이다. 『청정도론』은 무상을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것’(hutvā abhāvato), 또는 ‘일어남과 사라짐과 변화를 지닌 것’(uppādavayaññathattabhāvā)이라고 정의한다. 둘째 편에서 조건 지어진 것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을 대비하며 잠시 보았듯이, 붓다는 「형성된 것의 특징 경」(AN 3.47)에서 조건 지어진 것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설한다.
그림 4-2조건 지어진 것의 세 가지 특징 (AN 3.47)
무엇이든 조건에 따라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고, 생겨나서 사라지기까지 머무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변한다.
상식의 무상과 붓다의 무상
무상하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꽃이 지고 사람이 늙고 왕조가 무너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붓다가 가르친 무상은 이런 상식보다 훨씬 철저하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상식의 무상
어떤 것들은 변한다. 몸은 늙지만, 마음이나 영혼 같은 무언가는 변치 않고 남을 수도 있다.
무상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드러나는 변화다. 컵은 깨질 때 비로소 무상하다.
붓다가 가르친 무상
예외가 없다. 조건 지어진 것은 물질이든 마음이든 모두 무상하다.
무상은 지금 이 순간의 일어나고 사라짐이다. 컵을 이루는 물질과 컵을 보는 마음은 깨지기 전에도 매 순간 생멸하고 있다.
첫째, 무상은 예외 없이 모든 조건 지어진 것에 해당한다. 몸이 무상하다는 것은 받아들이면서 마음은 영원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붓다는 뜻밖의 말을 한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네 가지 큰 요소로 된 이 몸에 대해서는 염오할 수도 있다. 몸이 자라고 늙고 무너지는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라 하고 의식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 이것은 나,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오래도록 붙들어 왔기에 염오하지 못한다. 붓다는 차라리 몸을 자아로 여기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몸은 한 해, 두 해, 길게는 백 년도 머물지만, 마음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숲속을 옮겨 다니는 원숭이가 이 가지를 잡았다가 놓고 저 가지를 잡듯, 마음은 하나를 붙들었다가 놓고 또 다른 것을 붙든다.
우리는 흔히 몸보다 마음이 더 ‘나’답고 더 오래가는 것이라 여기지만, 붓다의 관찰은 정반대다. 가장 빨리 변하는 것이 마음이다. 조금 전의 기분, 조금 전의 생각이 지금 그대로 남아 있는지 돌아보면 이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둘째, 무상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나는 변화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일어나고 사라짐이다. 우리는 컵이 깨질 때 비로소 컵이 무상하다고 여기지만, 붓다의 눈에 컵을 이루는 물질과 컵을 보는 마음은 깨지기 전에도 매 순간 생멸하고 있다. 아비담마는 이를 물질과 마음이 극히 짧은 찰나 동안만 머문다는 찰나설로 정밀하게 설명하지만, 입문 단계에서는 무상이 ‘언젠가는 변한다’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다’는 뜻임을 새겨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상을 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무상을 이렇게 보는 것이 왜 중요한가? 「무상 경」(SN 22.12)에서 붓다는 다섯 무더기가 무상함을 보는 이에게 일어나는 일을 차례로 설한다.
그림 4-3무상을 보는 데서 해탈까지 (SN 22.12)
- 무상함을 봄다섯 무더기가 매 순간 사라지고 있음을 본다
- 염오nibbidā더 이상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 탐욕의 빛바램virāga물든 탐욕이 바랜다
- 해탈vimutti붙들던 것에서 풀려난다
우리가 무언가에 매달리는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머물러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 위에 떠 있는 거품을 손에 쥐려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곧 꺼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붙드는 것이 실은 거품과 다름없이 매 순간 사라지고 있음을 실제로 보면 매달릴 곳이 없어진다. 붓다는 「대반열반경」에서 마지막 말을 이렇게 남겼다.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자, 이제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방일하지 말고 성취하라.
「대반열반경」, DN 16
이 말은 무상을 아는 이가 취해야 할 태도를 보여 준다. “모든 것은 변하니 애쓸 것 없다”가 아니라 “모든 것은 변하니 방일하지 말라”다. 무상은 체념의 근거가 아니라 부지런히 정진해야 할 이유다. 지금 이 순간도 사라지고 있기에,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
괴로움
둘째 특성인 괴로움(dukkha)은 둘째 편에서 첫째 진리로 이미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그것이 ‘특성’으로서 무상과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자. 「무아의 특징 경」을 비롯한 여러 경에서 붓다는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라고 묻고 비구들은 “괴로움입니다”라고 답한다. 왜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청정도론』은 무상한 것이 ‘일어남과 사라짐에 의해 압박받기 때문에’(udayabbayapaṭipīḷana) 괴로움이라고 설명한다. 조건 지어진 것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내몰리며, 그 어느 것도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둘째 편에서 본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 가운데 ‘형성된 것인 괴로움’(saṅkhāradukkhatā)이 바로 이것이다. 특성으로서의 괴로움은 아프다는 느낌이 아니라, 무상한 것이 지닌 구조적인 불안정함이다.
다함, 두려움, 알맹이 없음
『무애해도』(Paṭisambhidāmagga)는 세 특성의 뜻을 한마디씩으로 요약한다.
‘다함’이라는 뜻에서. 무엇이든 다하여 없어지기 마련이다.
‘두려움’이라는 뜻에서. 다하여 없어질 것에 의지하는 한 두려움이 따른다.
‘알맹이가 없다’는 뜻에서. 그 안에 붙들 만한 핵심이 없다.
괴로움이 ‘두려움’이라는 뜻에서 괴로움이라는 이 설명은 곱씹어 볼 만하다. 무상한 것에 의지하는 이는 그것이 사라질 때를 늘 두려워해야 한다.
이 두려움은 무상한 것에 의지하는 한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두려워할 것도 많아진다. 그래서 무상한 것은 지금 당장 아프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괴로움이다. 괴로움이라는 특성은 ‘지금 아프다’가 아니라 ‘여기에 기대어 편히 쉴 수 없다’는 뜻이다.
붓다가 다섯 무더기를 괴로움이라고 설한 것은 즐거운 느낌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둘째 편에서 「마할리 경」(SN 22.60)을 통해 보았듯 다섯 무더기에는 달콤함이 있다. 다만 그 달콤함마저 무상하기에 괴로움의 특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 특성을 잇는 한 줄
붓다는 여러 경에서 세 특성을 한 줄로 잇는다.1
Rūpaṃ, bhikkhave, aniccaṃ. Yadaniccaṃ taṃ dukkhaṃ; yaṃ dukkhaṃ tadanattā; yadanattā 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움인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무상한 것 경」, SN 22.15
그림 4-4세 특성의 사슬
압박받으므로
안식처가 못 되므로
보아야 한다
이 한 줄이 세 특성의 논리를 압축하고 있다. 세 특성은 따로 떨어진 세 가지 사실이 아니라, 하나를 깊이 보면 다른 것이 따라 보이는 하나의 사슬이다. 다음 절에서 「무아의 특징 경」과 함께 이 사슬을 자세히 따라가 보자.
- 이 한 줄의 정형구는 「무상한 것 경」(SN 22.15)을 비롯하여 무더기 상윳따와 감각장소 상윳따의 여러 경에 되풀이하여 나온다.
「무아의 특징 경」
무아(anattā)는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가장 오해되기 쉬운 것이다. 붓다 당시 인도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몸과 마음의 변화 뒤에 변치 않고 지속하는 자아(attā, 산스크리트어로 아트만)가 있다고 여겼다. 몸은 옷처럼 갈아입는 것이고, 그 옷을 입는 영원한 주인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다. 붓다는 그런 자아를 다섯 무더기 안에서도 밖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설했다.
「초전법륜경」에 이어 붓다가 다섯 수행자에게 설한 두 번째 설법이 바로 이 가르침이며, 이 설법을 듣고 다섯 수행자가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무아의 특징 경」(Anattalakkhaṇa Sutta, SN 22.59)이 그것이다. 경은 두 가지 논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논증: 뜻대로 되지 않는다
Rūpaṃ, bhikkhave, anattā. Rūpañca hidaṃ, bhikkhave, attā abhavissa, nayidaṃ rūpaṃ ābādhāya saṃvatteyya, labbhetha ca rūpe – ‘evaṃ me rūpaṃ hotu, evaṃ me rūpaṃ mā ahosī’ti. Yasmā ca kho, bhikkhave, rūpaṃ anattā, tasmā rūpaṃ ābādhāya saṃvattati, na ca labbhati rūpe – ‘evaṃ me rūpaṃ hotu, evaṃ me rūpaṃ mā ahosī’ti.
비구들이여, 물질은 자아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물질이 자아라면 이 물질은 고통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고, 물질에 대해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물질은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물질은 고통으로 이끌고, 물질에 대해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무아의 특징 경」, SN 22.59
같은 말이 느낌·인식·형성·의식에 되풀이된다. 이 논증은 당시 사람들이 자아에 대해 지녔던 관념을 전제로 한다. 자아란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자기 뜻대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몸은 병들지 말라고 해도 병들고, 느낌은 괴롭지 말라고 해도 괴로우며, 마음은 이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해도 그 생각을 한다. 잠들고 싶은 밤에 잠이 오지 않고, 잊고 싶은 기억이 되살아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섯 무더기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자아’라고 부를 만한 주인이 아니다. 『청정도론』은 이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avasavattanato) 무아라고 요약한다.
둘째 논증: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rūpaṃ niccaṃ vā aniccaṃ vā? Anicc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 Dukkh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ṃ, bhante.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아의 특징 경」, SN 22.59
붓다는 여기서 결론을 선언하지 않고 묻는다. 그리고 비구들이 스스로 답하게 한다. 답은 듣는 이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다. 아래에서 그 문답을 직접 따라가 보자. 무더기를 하나 고른 뒤, 붓다의 물음에 비구가 되어 답해 보는 것이다.
그림 4-5「무아의 특징 경」의 문답 따라가기
먼저 무더기를 하나 골라 보자.
이 문답은 세 특성이 하나의 사슬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앞 절에서 본 대로 일어나고 사라짐에 내몰리는 것은 안식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하고 괴로움인 것은 자아가 아니다. 자아란 영원하고 안온한 것이어야 하는데, 무상하고 괴로움인 것은 그 정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세 가지 그릇된 붙듦
붓다는 이 논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섯 무더기에 대한 세 가지 그릇된 붙듦을 지목한다. 주석서는 이 셋을 각각 다른 번뇌와 짝짓는다.
| 붙듦의 말 | 원어 | 붙드는 번뇌 | 일상의 모습 |
|---|---|---|---|
| 이것은 나의 것이다 | etaṃ mama | 갈애(taṇhā) | “내 몸, 내 기분, 내 생각”이라며 소유하려는 마음 |
| 이것은 나다 | esohamasmi | 자만(māna) |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남과 견주어 나를 세우는 마음 |
| 이것은 나의 자아다 | eso me attā | 그릇된 견해(diṭṭhi) | “이 안에 변치 않는 참된 내가 있다”는 믿음 |
무아를 본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붙듦을 하나씩 내려놓는 일이다. 경은 이어서 다섯 무더기 하나하나를, 과거·현재·미래와 안팎 등 열한 가지 방식 모두에 걸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고 설한다. 셋째 편에서 본 열한 가지 구분이 여기서 다시 쓰인다. 지금의 이 몸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모든 몸, 내 몸만이 아니라 남의 몸까지, 어느 것도 예외 없이 그렇게 보라는 것이다.
해탈의 공식
그리고 경은 그렇게 보는 성스러운 제자가 어떻게 해탈에 이르는지를 밝히며 끝난다.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형성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식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여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으며,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이런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꿰뚫어 안다.
「무아의 특징 경」, SN 22.59
여기서 ‘염오’로 옮긴 nibbidā는 혐오나 싫증이 아니라, 매력이 사라져 더 이상 마음이 끌리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성난 마음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흥미를 잃고 놓아 버리는 것이다.
사막에서 목마른 나그네가 멀리 물웅덩이를 보고 달려간다. 그러다 그것이 아지랑이였음을 분명히 알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그쪽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아지랑이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거기에 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염오란 이런 것이다. 다섯 무더기에 붙들 만한 알맹이가 없음을 보면, 마음은 억지로 떼어 놓지 않아도 저절로 그쪽으로 달려가기를 멈춘다.
염오에서 탐욕의 빛바램(virāga)이, 탐욕의 빛바램에서 해탈(vimutti)이 온다는 이 순서는 경전 전체에 걸쳐 되풀이되는 해탈의 공식이며, 위빳사나 수행이 걷는 길이기도 하다. 앞 절에서 본 「무상 경」의 순서와 같다는 점도 눈여겨보자. 무상을 보는 데서 출발하든 무아를 보는 데서 출발하든, 길은 염오와 빛바램과 해탈로 이어진다.
무아는 허무가 아니다
무아의 가르침은 두 방향의 오해를 낳는다. 하나는 ‘무아’를 ‘내가 없다’로 받아들여, 붓다가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가르쳤다고 여기는 오해다. 다른 하나는 그 반동으로 ‘다섯 무더기는 내가 아니지만 그 너머에 참된 나가 있다’고 여기는 오해다. 경전은 둘 다 물리친다.
침묵으로 답한 물음
「아난다 경」(SN 44.10)에서 유행자 왓차곳따가 붓다에게 “자아는 있습니까?”라고 묻자 붓다는 침묵했다. “그러면 자아는 없습니까?”라고 묻자 역시 침묵했다. 왓차곳따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난 뒤 아난다 존자가 까닭을 여쭙자 붓다는 이렇게 답한다.
Ahañc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atthattā’ti puṭṭho samāno ‘atthattā’ti byākareyyaṃ, ye te, ānanda, samaṇabrāhmaṇā sassatavādā tesametaṃ saddhiṃ abhavissa. Ahañc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natthattā’ti puṭṭho samāno ‘natthattā’ti byākareyyaṃ, ye te, ānanda, samaṇabrāhmaṇā ucchedavādā tesametaṃ saddhiṃ abhavissa. … Ahañc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natthattā’ti puṭṭho samāno ‘natthattā’ti byākareyyaṃ, sammūḷhassa, 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bhiyyo sammohāya abhavissa – ‘ahuvā me nūna pubbe attā, so etarahi natthī’ti.
아난다여, 유행자 왓차곳따가 ‘자아는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있다’고 답했다면, 아난다여, 그것은 상견을 주장하는 사문과 브라만들의 편에 서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아난다여, 유행자 왓차곳따가 ‘자아는 없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없다’고 답했다면, 아난다여, 그것은 단견을 주장하는 사문과 브라만들의 편에 서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 아난다여, 유행자 왓차곳따가 ‘자아는 없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없다’고 답했다면, 이미 혼란스러운 유행자 왓차곳따는 ‘예전에는 나에게 자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구나’라며 더욱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아난다 경」, SN 44.10
이 경은 무아가 ‘자아가 없다’는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님을 보여 준다. ‘자아가 있다’는 것은 영원한 자아를 세우는 상견이고, ‘자아가 없다’는 것은 있던 자아가 죽음과 함께 끊어진다는 단견이다. 이 두 견해는 모두 ‘자아’라는 것을 전제한 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를 다투고 있다. 붓다는 그 전제 자체를 떠난다.
그림 4-6있음과 없음의 두 극단, 그리고 붓다의 자리
둘째 편에서 본 두 극단의 그림과 같은 짜임이다. 쾌락과 고행이 몸이라는 축의 양 끝이었듯, 상견과 단견은 ‘자아’라는 축의 양 끝이다.
붓다가 말한 무아는 “다섯 무더기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그 어느 것도 자아가 아니다”라는, 경험에 대한 관찰의 결과다. ‘자아는 없다’는 말은 자아라는 것을 세워 놓고 그것을 부정하는 말이지만, ‘모든 법은 무아이다’는 있는 법들 하나하나가 자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의 침묵과 “모든 법은 무아이다”라는 가르침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침묵은 잘못 세워진 물음에 대한 답이었고, 무아는 있는 그대로 살핀 결과에 대한 말이었다.
그러므로 무아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다섯 무더기는 실제로 있으며, 조건에 따라 실제로 일어나고 사라진다. 업은 실제로 과보를 맺고, 괴로움은 실제로 괴로우며, 그 소멸은 실제로 실현된다. 없는 것은 그 모든 일을 겪는 ‘변치 않는 주인’일 뿐이다. 『청정도론』 제16장은 이를 아름다운 게송으로 요약한다.
Dukkhameva hi, na koci dukkhito; kārako na, kiriyāva vijjati;
atthi nibbuti, na nibbuto pumā; maggamatthi, gamako na vijjati.오직 괴로움이 있을 뿐 괴로워하는 자는 없고, 행위는 있으나 행위자는 없다.
적멸은 있으나 적멸에 든 사람은 없고, 길은 있으나 그 길을 가는 자는 없다.『청정도론』 제16장
이 게송의 네 구절은 모두 앞에서 ‘있음’을 긍정하고 뒤에서 ‘주인’만을 부정한다. 괴로움은 있다. 행위도 있다. 적멸도 있고, 길도 있다. 허무주의라면 이 앞 구절들까지 부정했을 것이다. 무아는 세계를 지우는 가르침이 아니라, 세계 위에 덧씌운 ‘주인’이라는 그림자를 걷어 내는 가르침이다.
‘참된 나’는 없다
둘째 오해는 첫째 오해보다 미묘하다. 다섯 무더기가 나가 아니라면, 그 다섯 무더기를 보는 무언가, 그 뒤에 있는 순수한 의식이나 열반 자체가 참된 나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경전은 이 생각도 여러 방향에서 막는다.
오해열반이 곧 참된 나다.
제1절에서 보았듯 붓다는 “형성된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하면서도 무아에 대해서는 “모든 법은 무아이다”라고 설했다. 주석서가 이 차이를 열반까지 포함하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열반은 무상하지도 괴로움도 아니지만 자아는 아니다. 열반은 갈애가 소멸한 것이지, 갈애가 소멸한 뒤에 드러나는 ‘나’가 아니다.
오해순수한 의식이 윤회하는 참된 나다.
「갈애의 소멸 긴 경」(MN 38)에서 붓다는 의식을 윤회의 주체로 여긴 사띠 비구를 꾸짖었다. 셋째 편에서 보았듯 의식은 장작불과 짚불처럼 조건에 따라 이름이 붙는, 조건 따라 일어나는 앎일 뿐이다.
오해무더기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관찰자가 참된 나다.
「야마까 경」(SN 22.85)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지금 여기에서조차 여래를 다섯 무더기 안에서도 밖에서도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설한다. 무더기 뒤에 숨은 관찰자를 세우는 순간 그것은 다시 셋째 편에서 본 스무 가지 유신견 가운데 하나가 된다. 지켜보는 앎 역시 조건 따라 일어나는 의식의 무더기일 뿐이다.
관습적인 ‘나’
그렇다면 붓다는 왜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DN 16)고 하고, 『담마빠다』에서 이렇게 노래했는가?
Attā hi attano nātho, ko hi nātho paro siyā;
attanā hi sudantena, nāthaṃ labhati dullabhaṃ.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주인이니, 다른 누가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잘 길들일 때, 얻기 어려운 주인을 얻는다.『담마빠다』 Dhp 160
셋째 편에서 본 두 가지 진리의 구별이 답한다. 이런 말들은 관습적 표현이며, 여기서 ‘자신’은 다섯 무더기의 흐름을 관습적으로 가리키는 이름이지 그 흐름 뒤의 실체가 아니다. 붓다는 일상의 말을 그대로 쓰면서도 그 말에 속지 않았다. 「아라한 경」(SN 1.25)에서 한 신이, 번뇌를 다한 아라한도 ‘나는 말한다’, ‘그들이 나에게 말한다’고 하느냐고 묻자, 붓다는 아라한도 세상의 관습을 알기에 그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통용되는 표현일 뿐이라고 답한다.
무아를 배운 사람이 할 일은 ‘나’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쓰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잊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내일 절에 간다”고 말해도 좋다. 다만 그 ‘나’가 다섯 무더기의 흐름에 붙인 이름이라는 것을 알면, 그 ‘나’가 모욕당할 때 덜 흔들리고, 그 ‘나’가 칭찬받을 때 덜 우쭐하게 된다.
특성을 가리는 것들
세 특성이 붓다가 있든 없든 언제나 그러한 사실이라면,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가? 날마다 무상을 겪고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가 머물러 줄 것처럼, 어딘가에 안식처가 있을 것처럼, 이 모든 것의 주인이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청정도론』 제21장은 이 물음에 대한 고전적 답을 준다. 세 특성은 각각 무언가에 가려져 있어서, 그 가리는 것을 걷어 내지 않는 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특성 | 가리는 것 | 가려지는 까닭 | 드러내는 방법 |
|---|---|---|---|
| 무상 | 상속 santati | 앞의 것이 사라지자마자 뒤의 것이 이어져, 이어짐이 하나의 지속으로 보임 | 일어남과 사라짐을 마음에 잡도리하여 상속을 해체함 |
| 괴로움 | 자세 iriyāpatha | 한 자세의 괴로움이 다른 자세로 바꿈으로써 가려짐 | 끊임없는 압박을 마음에 잡도리하여 자세를 해체함 |
| 무아 | 덩어리 ghana | 여러 요소가 한 덩어리로 뭉쳐 하나의 것으로 보임 | 요소들로 나누어 마음에 잡도리하여 덩어리를 해체함 |
상속이 무상을 가린다
상속(santati)이 무상을 가린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앞의 것이 사라지자마자 비슷한 것이 뒤따라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 이어짐을 하나의 지속하는 것으로 본다. 영화 필름의 낱장들이 빠르게 이어지면 움직이는 하나의 장면으로 보이는 것과 같고, 교류 전원으로 켜진 전구가 실제로는 1초에 수십 번 꺼졌다 켜지기를 되풀이하는데도 그 점멸이 너무 빨라 우리 눈에는 그저 ‘계속 켜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아래의 등잔불로 이것을 직접 확인해 보자.
그림 4-7하나로 보이는 불꽃, 이어지는 불꽃들
지금 타는 불꽃: 1번째
빠르기를 초당 30번에 두면 불꽃은 하나의 고요한 불꽃처럼 보인다. 빠르기를 한두 번으로 늦추어 보자. 불꽃 하나하나가 켜졌다 꺼지고, 그 자리에 모양이 조금씩 다른 새 불꽃이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번호는 늦추기 전에도 쉬지 않고 바뀌고 있었다.
『밀린다왕문경』에서 나가세나 존자가 밀린다 왕에게 든 등불의 비유도 같은 이치를 보여 준다. 초저녁의 불꽃과 한밤의 불꽃과 새벽의 불꽃은 같은 불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등불이 켜진 것도 아니다. 같은 등잔에 의지하여 밤새 이어진 불꽃일 뿐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은 이 상속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일어남과 사라짐에 주의를 기울여 이어짐을 낱낱으로 풀어 볼 때 비로소 무상이 드러난다.
자세가 괴로움을 가린다
자세(iriyāpatha)가 괴로움을 가린다. 오래 앉아 있으면 괴로움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그 괴로움을 보기 전에 자세를 바꾼다. 일어서면 앉아 있던 괴로움이 사라지고, 걸으면 서 있던 괴로움이 사라진다. 이렇게 자세를 바꾸어 가며 괴로움을 계속 덮기 때문에 몸이 끊임없이 압박받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우리는 여러 번 자세를 고쳐 앉았을 것이다. 다리를 꼬았다 풀고, 어깨를 움직이고, 고개를 기울인다. 그 하나하나가 작은 괴로움을 피하는 몸짓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괴로움이라 여기지 않고 그저 ‘편하게 있으려는 것’이라 여긴다. 자세를 바꾸지 않고 압박을 그대로 관찰할 때 괴로움이 드러난다. 수행처에서 한 자세로 오래 앉는 것은 이 가림을 걷어 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덩어리가 무아를 가린다
덩어리(ghana)가 무아를 가린다. 물질과 느낌과 인식과 형성과 의식이 한데 뭉쳐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의 ‘나’로 본다. 소리를 들을 때 귀와 소리와 귀의 의식과 접촉과 느낌과 인식이 각기 조건 따라 일어나는데도, 그 모두가 ‘내가 듣는다’라는 하나의 덩어리로 경험된다. 요소들로 나누어 볼 때, 곧 셋째 편에서 배운 틀로 경험을 해체할 때 비로소 무아가 드러난다. 셋째 편의 분석이 이 편의 관찰과 이어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셋째 편 마지막에서 소리 하나를 문과 대상과 앎, 접촉과 느낌과 인식으로 가려 보았던 연습이 곧 덩어리를 해체하는 일이다.
이어짐이 낱낱의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풀리며 무상이 드러난다.
바꾸어 덮던 압박이 그대로 보이며 괴로움이 드러난다.
하나의 ‘나’가 요소들로 풀리며 무아가 드러난다.
지혜로 본다는 것
이 편 첫머리의 세 게송은 모두 “지혜로 볼 때”(yadā paññāya passati)라는 조건을 달고 있다. 세 특성은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과 지혜로 보는 것이 다르다. 무상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실제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불이 뜨겁다는 것을 책으로 아는 것과 손끝으로 아는 것이 다르듯이.
붓다가 다섯 수행자에게 「무아의 특징 경」을 설했을 때 그들이 아라한이 된 것은 그 설법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흐름에 든 이로서 설법을 들으며 자신의 다섯 무더기에서 세 특성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세 특성을 이렇게 직접 보는 수행이 위빳사나(vipassanā), 곧 ‘꿰뚫어 봄’이며, 이 강좌의 열두째 편이 그것을 다룬다. 그때까지 이 편의 내용은, 가림을 걷어 낼 곳이 어디인지를 미리 알려 주는 지도로 삼으면 된다.
용어 정리
이 편에서 새로 만난 빠알리 용어들이다. 읽기는 이 강좌의 한글 표기 원칙을 따랐고, 용례는 이 편에 실린 원문에서 골랐다. 세 특성과 세 가지 가림, 그리고 염오·빛바램·해탈처럼 셋씩 짝을 이루는 용어는 짝과 함께 외워 두면 오래 남는다.
| 번호 | 원어 | 읽기 | 분류 | 뜻 | 용례 |
|---|---|---|---|---|---|
| 1 | anicca | 아닛짜 | 세 특성 | 무상(無常). 영원하지 않음, 생겨났다가 없어짐 | Sabbe saṅkhārā aniccā형성된 모든 것은 무상하다 |
| 2 | dukkha | 둑카 | 세 특성 | 괴로움. 일어남과 사라짐에 압박받음 | Sabbe saṅkhārā dukkhā형성된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
| 3 | anattā | 아낫따 | 세 특성 | 무아(無我). 자아가 아님 | Sabbe dhammā anattā모든 법은 무아이다 |
| 4 | tilakkhaṇa | 띨락카나 | 세 특성 | 세 가지 특성, 삼특상(三特相) | tilakkhaṇa무상·괴로움·무아의 세 특성 |
| 5 | sāmaññalakkhaṇa | 사만냘락카나 | 세 특성 | 보편적 특성. 모든 조건 지어진 것에 공통되는 특성 | sāmaññalakkhaṇa보편적 특성 |
| 6 | saṅkhāra | 상카라 | 범위 | 형성된 것. 여기서는 조건 지어진 모든 것 | sabbe saṅkhārā형성된 모든 것 |
| 7 | dhamma | 담마 | 범위 | 법. 조건 지어진 것과 열반을 모두 포함함 | sabbe dhammā모든 법 |
| 8 | dhammaniyāmatā | 담마니야마따 | 법칙 | 법의 결정성. 붓다의 출현과 무관한 법칙 | ṭ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그 요소는 그대로 머무니, 법의 확립성이요 법의 결정성이다 |
| 9 | uppāda | 웁빠다 | 무상 | 일어남 | uppādo paññāyati일어남이 알려진다 |
| 10 | vaya | 와야 | 무상 | 사라짐, 무너짐 | vayadhammā saṅkhārā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
| 11 | appamāda | 압빠마다 | 무상 | 방일하지 않음, 불방일(不放逸) | appamādena sampādethā방일하지 말고 성취하라 |
| 12 | udayabbaya | 우다얍바야 | 괴로움 | 일어남과 사라짐, 생멸(生滅) | udayabbayapaṭipīḷana일어남과 사라짐에 의해 압박받음 |
| 13 | khaya | 카야 | 괴로움 | 다함. 무상의 뜻 | khayaṭṭhena다함이라는 뜻에서 |
| 14 | bhaya | 바야 | 괴로움 | 두려움. 괴로움의 뜻 | bhayaṭṭhena두려움이라는 뜻에서 |
| 15 | asāraka | 아사라까 | 무아 | 알맹이가 없음. 무아의 뜻 | asārakaṭṭhena알맹이가 없다는 뜻에서 |
| 16 | attā | 앗따 | 무아 | 자아. 변치 않고 스스로를 다스린다고 여겨지는 주인 | eso me attā이것은 나의 자아다 |
| 17 | avasavattana | 아와사왓따나 | 무아 | 지배할 수 없음, 뜻대로 되지 않음 | evaṃ me rūpaṃ hotu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라 |
| 18 | māna | 마나 | 붙듦 | 자만. ‘이것은 나다’라는 붙듦 | esohamasmi이것은 나다 |
| 19 | diṭṭhi | 딧티 | 붙듦 | 견해. 여기서는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는 그릇된 견해 | eso me attā이것은 나의 자아다 |
| 20 | nibbidā | 닙비다 | 해탈 | 염오(厭惡). 매력이 사라져 마음이 끌리지 않음 | rūpasmimpi nibbindati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
| 21 | virāga | 위라가 | 해탈 | 탐욕의 빛바램, 이욕(離欲) | nibbindaṃ virajjati염오하여 탐욕이 빛바랜다 |
| 22 | vimutti | 위뭇띠 | 해탈 | 해탈, 풀려남 | virāgā vimuccati탐욕이 빛바래어 해탈한다 |
| 23 | sassatavāda | 삿사따와다 | 견해 | 상견(常見). 영원한 자아가 있다는 주장 | sassatavādā상견을 주장하는 이들 |
| 24 | ucchedavāda | 웃체다와다 | 견해 | 단견(斷見). 자아가 죽음과 함께 끊어진다는 주장 | ucchedavādā단견을 주장하는 이들 |
| 25 | nibbuti | 닙부띠 | 무아 | 적멸, 꺼짐 | atthi nibbuti, na nibbuto pumā적멸은 있으나 적멸에 든 사람은 없다 |
| 26 | nātha | 나타 | 관습 | 주인, 의지처 | Attā hi attano nātho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주인이다 |
| 27 | santati | 산따띠 | 가림 | 상속(相續). 무상을 가리는 이어짐 | santati상속 |
| 28 | iriyāpatha | 이리야빠타 | 가림 | 자세, 위의(威儀). 괴로움을 가리는 자세 바꿈 | iriyāpatha네 가지 자세 |
| 29 | ghana | 가나 | 가림 | 덩어리. 무아를 가리는 뭉침 | ghana덩어리 |
| 30 | vipassanā | 위빳사나 | 수행 | 꿰뚫어 봄. 세 특성을 직접 보는 수행 | yadā paññāya passati지혜로 볼 때 |
이 편의 전거 약어
이 편에서 인용한 경전과 논서의 약어다. ‘SN 44.10’은 『상윳따 니까야』 제44 상윳따의 열 번째 경을, ‘Dhp 277–279’는 『담마빠다』의 277번부터 279번까지의 게송을 가리킨다.
| 약어 | 원서명 | 우리말 이름 |
|---|---|---|
| DN | Dīghanikāya | 디가 니까야 (길게 설하신 경 모음) |
| MN | Majjhimanikāya | 맛지마 니까야 (중간 길이로 설하신 경 모음) |
| SN | Saṃyuttanikāya | 상윳따 니까야 (주제별로 묶은 경 모음) |
| AN | Aṅguttaranikāya | 앙굿따라 니까야 (숫자별로 묶은 경 모음) |
| Dhp | Dhammapada | 담마빠다 (법구경) |
| Paṭis | Paṭisambhidāmagga | 빠띠삼비다막가 (무애해도) |
| Vism | Visuddhimagga | 청정도론 |
이해도 점검
이 편의 핵심을 다섯 문제로 확인해 보자. 보기를 누르면 곧바로 채점되고, 그 아래의 해설을 펼쳐 볼 수 있다. 마지막 문제는 여러 절의 내용을 함께 엮어야 풀 수 있는 심화 문제다. 푼 기록은 이 기기에 남으므로 나중에 돌아와도 이어서 볼 수 있다.
빠알리 정형구에서 무상과 괴로움은 ‘형성된 모든 것’(sabbe saṅkhārā)을, 무아는 ‘모든 법’(sabbe dhammā)을 주어로 쓴다. 주석서에 따를 때 그 까닭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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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된 것’(saṅkhāra)은 여기서 조건에 따라 형성된 모든 것, 곧 다섯 무더기 전체를 가리킨다. 무상과 괴로움은 조건 지어진 것에만 해당한다. 그러나 ‘법’(dhamma)에는 조건 지어지지 않은 열반도 든다. 주석서는 셋째 정형구가 열반까지 포함하여 모든 법이 무아라고 설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래서 다는 정반대다. 열반은 무상하지도 괴로움도 아니지만 자아는 아니다. 가는 ‘형성된 것’을 좁은 뜻, 곧 넷째 무더기로 잘못 읽은 것이다.
「무아의 특징 경」의 첫째 논증이 다섯 무더기를 자아가 아니라고 보는 근거로 가장 알맞은 것은?
해설 펼치기
첫째 논증은 당시 사람들이 지녔던 자아의 관념, 곧 자아란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자기 뜻대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라는 관념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몸은 병들지 말라고 해도 병들고, 느낌은 괴롭지 말라고 해도 괴롭다. 『청정도론』은 이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avasavattanato) 무아라고 요약한다. 나는 틀렸다. 다섯 무더기는 실제로 있으며 조건 따라 실제로 일어나고 사라진다. 다는 이 편에서 본 ‘참된 나’라는 둘째 오해이고, 라는 경의 논지와 무관하다.
주석서가 다섯 무더기에 대한 세 가지 그릇된 붙듦을 번뇌와 짝지은 것으로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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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의 것이다’(etaṃ mama)는 소유하려는 갈애의 붙듦, ‘이것은 나다’(esohamasmi)는 나를 세우고 남과 견주는 자만의 붙듦, ‘이것은 나의 자아다’(eso me attā)는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의 붙듦이다. 무아를 본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붙듦을 하나씩 내려놓는 일이며, 경은 그래서 다섯 무더기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라고 설한다.
「아난다 경」(SN 44.10)에서 붓다가 “자아는 있습니까?”, “자아는 없습니까?”라는 왓차곳따의 물음에 모두 침묵한 까닭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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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자아는 있다’고 답했다면 상견을 주장하는 이들의 편에, ‘자아는 없다’고 답했다면 단견을 주장하는 이들의 편에 서게 되었을 것이라고 아난다에게 설명한다. 또 ‘없다’는 답은 이미 혼란스러운 왓차곳따를 “예전에는 자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구나”라는 더 큰 혼란에 빠뜨렸을 것이다. 무아는 자아를 세워 놓고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니라, 있는 법 하나하나를 살펴 어느 것도 자아가 아님을 보는 관찰이다. 라는 틀렸다. 붓다는 “모든 법은 무아이다”라고 분명한 말로 가르쳤다.
이 편의 내용에 비추어 다음 진술 가운데 옳은 것만을 모두 고른 것은?
- ㄱ. 교류 전원으로 켜진 전구가 실제로는 쉼 없이 깜박이는데도 계속 켜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는, 『청정도론』에서 자세가 괴로움을 가리는 방식을 보여 준다.
- ㄴ. 무아를 가리는 ‘덩어리’를 해체하는 일은, 셋째 편에서 배운 다섯 무더기·감각장소·요소의 틀로 경험을 나누어 보는 일과 이어진다.
- ㄷ. 열반은 무상하지도 괴로움도 아니므로, 다섯 무더기 너머에 드러나는 참된 자아로 이해할 수 있다.
- ㄹ. 붓다가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주인”이라고 한 것은 관습적 표현이므로 무아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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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은 옳다. 물질과 느낌과 인식과 형성과 의식이 한데 뭉쳐 일어나 하나의 ‘나’로 보이는 것이 덩어리이고, 그것을 요소들로 나누어 보는 것이 셋째 편의 분석이다. ㄹ도 옳다. 이런 말들의 ‘자신’은 다섯 무더기의 흐름을 관습적으로 가리키는 이름이며, 붓다는 일상의 말을 쓰면서도 그 말에 속지 않았다(SN 1.25).
ㄱ은 틀렸다. 빠르게 이어지는 점멸이 하나의 지속으로 보이는 것은 상속(santati)이 무상을 가리는 방식의 예다. 자세(iriyāpatha)는 한 자세의 괴로움을 다른 자세로 바꾸어 덮음으로써 괴로움을 가린다. ㄷ도 틀렸다. 무아의 정형구가 ‘모든 법’을 주어로 쓰는 것은 바로 열반까지 무아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며, 열반은 갈애가 소멸한 것이지 그 뒤에 드러나는 ‘나’가 아니다. 따라서 정답은 ㄴ, ㄹ이다.